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이사야 33:17~24)
나이 든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 그 고생을 생각하면 지금은 꿈만 같다." 전쟁을 겪은 세대, 보릿고개를 넘긴 세대가 요즘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 짓는 표정이 그렇습니다. 분명히 겪은 일인데, 너무 아득해서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33장이 그리는 시온의 모습이 꼭 그렇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 밑까지 진을 치고, 조공을 걷으러 다니는 관리들이 집집마다 저울을 들고 다니며 세금을 매기고, 어디선가 낯선 정보원이 골목을 서성이며 감시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그립니다. 서슬 퍼런 이방인 총독, 가혹하게 세금을 물리던 징수관, 늘 뒤를 밟던 정보원들, 그런데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그날에는 이 모든 것이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너무 완전하게 회복되어서, 그 무서웠던 기억을 애써 떠올려야만 겨우 생각나는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33장 17절부터 24절까지 펼쳐지는 시온의 영광입니다. 앗수르의 위협이 물러가고 히스기야 왕의 통치가 회복되는 그림이면서, 동시에 그보다 훨씬 먼 곳인 메시아 왕국, 새 하늘과 새 땅을 내다보는 그림입니다.
19절은 조금 낯선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네가 다시는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니 이는 방언이 이상하여 네가 알아듣지 못하는 백성이라." 왜 굳이 '방언'을 언급할까요?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이것은 우연한 표현이 아닙니다. 창세기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류의 언어는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할 때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쓰는 민족'이 심판의 도구로 등장한다고 반복해서 경고합니다.
신명기 28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리면 알지 못하는 언어를 쓰는 나라가 독수리처럼 덮칠 것이라 말하고, 이사야 28장은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라 하며, 예레미야 5장도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고 똑같은 경고를 되풀이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낯선 언어'는 단순한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심판의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 가운데 남은 자를 남겨두셨고, 그 심판이 끝나면 오히려 다른 언어를 쓰던 자들까지 은혜 안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 흐름이 마침내 오순절에 폭발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시자 각 사람이 자기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됩니다. 언어로 갈라졌던 인류가, 언어를 초월해 하나의 복음으로 다시 묶이는 것입니다.
이사야 33장 19절이 예언하는 "다시는 낯선 방언을 듣지 않는 나라"는 결국 한 민족의 언어 통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언어가 하나의 찬양으로 모이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중심으로 정치적 시오니즘을 외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냉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약 예수님이 이 땅의 영토와 정치권력을 목표로 삼으셨다면, 그분은 얼마든지 무력으로 그것을 쟁취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시온의 영광은 특정 지리적 국경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는 자리에 있습니다.
20절은 예루살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안정한 처소,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는 성읍이다." 그런데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실제로 여러 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로마에게 무너지고, 그 이후로도 숱한 침략을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실패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예루살렘은 애초부터 지도 위의 그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아모스 9장 11절은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장막의 완성된 모습을 요한계시록 21장이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한 예루살렘은 무너질 수 있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시온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벽돌과 성벽에 있지 않고, 그 안에 누가 계시느냐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솔직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지금 눈물도 없고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그럭저럭 평안하게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이 약속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는 눈물이 없다"는 말이, 지금 눈물 흘려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문장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싸움을 실제로 싸우고 있는 사람, 자기 힘으로는 슬픔과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약속이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물과 같습니다. 거짓 평안에 취해 "평안하다, 평안하다" 되뇌는 사람과, 진짜 씨름 중인 사람 사이에는 이 한 구절을 읽는 온도 차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22절은 아주 대담한 문장입니다.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재판하는 자, 법을 만드는 자, 다스리는 자, 근대 민주주의라면 삼권분립이라는 이름으로 반드시 나눠놓을 세 가지 권력을 하나님은 혼자 다 쥐고 계십니다.
인간 세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그것을 독재라고 부를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사법과 입법과 행정을 한 사람이 독점했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익히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 세 권력을 다 가지고 계시는 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통치라고 말입니다.
왜일까요? 인간의 독재가 위험한 이유는 그 권력을 쥔 자가 불완전하고 편파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는 그런 결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아주 날카로운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스스로 재판장이 되고, 스스로 법을 세우고, 스스로 왕 노릇을 합니까?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후한 판결을 내립니다. 내가 정한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나누고, 결국 내가 내 삶의 왕좌에 앉습니다. 사탄이 반역한 것도, 인간이 죄에 빠진 것도 본질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탐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앞에서 "그런 나라, 별로다"라는 반응이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온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 안에 왕좌를 내려놓지 못한 미련이 남아있다는 신호일 것입니다.
23절이 이 본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너의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옛날 배는 돛과 노로 움직였습니다. 그 돛을 매다는 밧줄이 다 풀리고, 돛대는 흔들거리고, 결국 돛을 올릴 수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엔진이 완전히 고장 나서 항구에 정박한 채 꼼짝도 못 하는 배와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형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최선을 다한다 해도, 죄인인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 없이 온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써 준비해도 우리 손에서 나온 것은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돛조차 올릴 수 없는 배로 무슨 전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문장 다음에 반전이 옵니다. "그때에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게 될 것이라. 저는 자도 그 탈취물을 얻으리라." 항해조차 못 하는 배가, 전쟁조차 나가지 못하는 이 다리 저는 자가, 전리품을 나누어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성경은 이 그림의 답을 다른 곳에서 이미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다윗이 시글락에 머물던 때의 일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성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노략질해 갔습니다.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는데, 육백 명 중 이백 명은 너무 지쳐 브솔 시내에 남고, 사백 명만 끝까지 따라가 대승을 거두고 엄청난 전리품을 되찾아 왔습니다. 그때 함께 싸운 이들 중 몇몇이 "저 이백 명은 싸우지 않았으니 처자식만 돌려주고 전리품은 나눠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자들을 "악한 자요 비류"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우리에게 이것을 주신 여호와께서 주신 것을, 지킨 자나 싸운 자나 똑같이 나누리라." 성과급으로 따지면 부당해 보일 수 있는 이 결정이, 여호와의 전쟁에서는 오히려 정의입니다.
시편 68편도 같은 그림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싸워 이기신 결과로, 집에 가만히 앉아있던 여인까지 전리품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에베소서 4장은 이 시편 구절을 직접 인용하며,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고 그 전리품으로 사람들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33장 23절이 가리키는 실체입니다. 돛도 올리지 못하는 우리가, 대신 싸워서 승리하신 분의 전리품을 값없이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도 한몫했다"고 말하는 악한 자와 비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그저 은혜로 나눔을 받는 저는 자의 자리에 서 있는가. 저는 자가 받는 몫이야말로 진짜 은혜입니다. 자기 공로를 조금이라도 얹으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게 됩니다.
본문의 마지막 24절은 이렇게 맺습니다. "그 거주민이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는 거기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았음이니라." 시온의 영광은 결국 죄 사함을 받은 자들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실력과 능력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리,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만이 통치의 기준이 되는 자리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이런 곳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는 신앙생활에 별로 기여한 게 없다"고 느껴도, 누군가 다리를 절 듯 믿음이 약해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함을 받은 자라면 이미 그 전리품의 몫을 나누어 받은 자입니다. 옛날의 두려운 기억이 꿈결처럼 아득해지고, 돛조차 올릴 수 없던 배가 승리의 몫을 나누는 이 역전이야말로 시온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저는 자들입니다. 소망을 품고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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