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5:1)
우리는 흔히 죽음을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숨이 멎고, 심장이 멈추고, 더 이상 말도 움직임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죽음은 늘 두려움의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만일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전환이라면 어떨까요? 죽음을 그렇게 바라보십시오. 죽음은 생명의 종료가 아니라, 몸이라는 옷을 벗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이 세상에 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옷을 입고 벗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옷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복장이 달라집니다. 육체도 이와 비슷합니다. 영혼이 이 지구라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입은 하나의 옷, 혹은 잠수복과 같은 것입니다.
잠수부가 깊은 바다로 들어갈 때 일반 옷을 입지 않는 것처럼, 영혼은 물질 세계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활동하기 위해 육체라는 보호 장치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잠수복에는 사용 기한이 있습니다. 오래되면 찢어지고, 기능을 상실합니다. 더 이상 생명을 보호하지 못할 때, 잠수부는 그 옷을 벗고 밖으로 나옵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육체라는 ‘지구복’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할 때, 영혼이 그 옷을 벗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옷이지, 사람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죽음은 차원의 이동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없어짐”이 아니라 “이동”에 가깝습니다. 마치 평면 세계에 살던 존재가 입체 세계로 옮겨 가는 것처럼, 육체 차원의 삶이 끝나고 영체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전환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도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자궁이라는 환경에서 나와 전혀 다른 공기, 빛, 소리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때도 울음과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확장이었습니다. 죽음 역시 그렇습니다. 익숙한 차원을 떠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순간의 문턱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잘 죽고 싶다면, 먼저 잘 살아야 한다.”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큰 업적이나 종교적 의무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타인을 배려하고, 미움을 키우기보다 용서를 연습하고, 욕심보다는 감사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랜 병상에 누워 있던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간호사를 향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너희 덕분에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임종은 조용했고, 얼굴에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미소가 남아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마치 잠든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죽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삶의 태도가 죽음의 표정을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고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질수록,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지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와 계신다”, “형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이제 같이 가면 된다고 한다.” 이를 ‘임종 침상 비전’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점은, 이 현상이 대부분 두려움이 아니라 안도감을 동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듯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얼굴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낯선 길을 갈 때 부모의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되는 것처럼, 죽음의 문턱에서도 영혼은 혼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 장면은 죽음을 형벌이나 공포로만 묘사해 온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사후 세계가 있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자 파스칼은 아주 현실적인 대답을 남겼습니다. 만약 사후 세계가 없는데 믿고 준비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선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손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후 세계가 있는데도 믿지 않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때의 손해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은 깊은 잠과 같으니 두려울 이유가 없고, 무언가가 있다면 그곳에서 진리를 알고,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역시 두려울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죽음을 부정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적인 평온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뇌가 의식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도 있습니다. 뇌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니라, 의식을 받아들이는 수신기라는 생각입니다. TV가 고장 나면 화면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방송국의 프로그램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뇌가 손상되거나 기능을 멈추면 의식 표현은 사라지지만, 의식 그 자체가 소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엄청난 정보와 기억, 자아를 담고 있는 에너지 진동체이며, 육체는 그것을 이 차원에서 표현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돌아가신 분들과 쉽게 만날 수 없는가?” 그 이유는 파동의 차이에 있습니다. 영계는 매우 빠른 진동의 세계이고, 물질계는 상대적으로 느린 진동의 세계입니다. 마치 서로 다른 주파수의 라디오가 맞지 않으면 잡음만 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소통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꿈속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만난 사람, 현실보다 더 또렷한 대화, 깨어나도 지워지지 않는 감각, 또는 특정한 향기, 음악, 소리로 전해지는 위로, 이런 사후 통신은 대부분 과시적이지 않고, 위로와 안심을 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선물에 가깝습니다.
결국 죽음은 이렇게 정의됩니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이사.” 우리는 이사를 준비할 때 정리합니다. 필요 없는 것을 내려놓고, 꼭 필요한 것만 챙깁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물질은 두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 태도, 영혼의 방향성은 함께 가져갑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를 긍정하는 삶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삶을 더 진지하게, 더 따뜻하게 살게 만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죽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준비가 아니라 오늘을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옷을 벗고, 더 넓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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