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죽음은 늘 갑작스럽고, 잔인하며, 모든 것을 끝내는 사건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 멀었어”, “지금은 바빠”라는 말로 죽음을 삶의 밖으로 밀어냅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의 외면과 상관없이,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느 교수는 죽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옮겨감’입니다.
그는 죽음을 ‘댐이 무너지는 순간’에 비유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계에 다다른 구조물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육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시간 사용되어 온 몸이라는 그릇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몸이 멈추면, 의식도 함께 사라질까? 2015년, 일부 과학자들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지속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 근거로 제시된 것들은 근사 체험, 데스베드 비전(삶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환시), 그리고 사후 의식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들이었습니다.
예컨대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사라진 상태에서, 수술실의 대화나 의료진의 행동을 정확히 기억해낸 환자들의 증언은 단순한 착각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었습니다. 마치 육체라는 잠수복을 벗은 의식이, 잠시 다른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돌아온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동인 것입니다. 머무는 공간과 방식이 바뀔 뿐,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이해입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전통적인 이분법적 공간 개념으로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평생 살아온 삶의 방향과 태도가 만들어내는 상태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도 경험합니다. 늘 불평과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비슷한 정서를 가진 이들과 모입니다. 반대로 감사와 배려로 살아온 사람은, 자연스레 그와 닮은 사람들 속에 머뭅니다. 이것이 바로 유유상종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갑질과 무시, 타인의 고통 위에 서는 삶을 살아온 사람은, 그와 같은 결을 가진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사랑과 배려, 감사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또 그에 합당한 곳으로 옮겨갑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어느 날 갑자기 판결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오면서 스스로 준비해 온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삶의 회고’입니다. 죽음 직전, 혹은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회고는 단순한 추억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자신이 남에게 준 고통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대로 느끼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던 기억이 있다면, 그 장면을 다시 보되 이번에는 모욕당한 사람의 마음으로 느낍니다. 말 한마디로 상처를 준 순간이 있다면, 그 말이 가슴을 찌르는 아픔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평소에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을 함부로 대했던 이들일수록, 그 회고의 순간은 말할 수 없이 괴롭다고 합니다. 누구도 변명할 수 없고,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는, 오직 자신과 진실만 마주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당신이 남긴 흔적은, 다시 마주해도 괜찮을 삶인가?”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하던 그 자신도 죽음을 먼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방광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받으며,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과거의 그는 전형적인 ‘성과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논문 몇 편을 더 쓰는지, 연구비를 얼마나 따오는지,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가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늘 바쁘고, 늘 쫓기듯 살았습니다.
그러나 암 진단 이후, 그는 매일 아침 기도 제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두 다리로 걷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숨 쉬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에는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결국 시골로 내려가 자연 속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무를 바라보고, 하늘의 빛을 기록하며, 바람의 방향을 느끼는 삶, 더 많이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더 깊이 느끼는 삶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가 가장 강조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죽음은 닥쳐서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왜 하필 나인가”라는 원망에 사로잡히고, 지나간 선택들에 대한 후회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 지쳐 있어, 제대로 준비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언장,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 같은 것들은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가 아니라, 지금처럼 맑고 건강할 때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남은 이들에게도, 자신에게도 품위를 지켜주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준비는 문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우울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옮겨감임을 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훨씬 더 소중히 살게 됩니다. 말 한마디를 더 조심하게 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조금 더 따뜻해지고, 오늘 숨 쉬고 있는 이 평범한 하루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하늘도 고맙고, 나무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잘 준비된 죽음의 연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충만한 삶의 고백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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