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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창세기 - 고난이 데려가는 곳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1.

창세기 39장 20~23절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작은 병실에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올 무렵, 한 목회자가 침대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침대에 누운 이는 간암 말기를 앓던 한 성도였습니다. 며칠 전 심방했을 때 그녀는 지나온 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내뱉었습니다. "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예수를 믿었는데,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시간 남짓 복음을 다시 듣고 나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며칠 뒤 그녀는 마지막으로 목사를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목사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다만 의사들은 청각만은 아직 살아있을 거라 했습니다. 목사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마에 손을 얹은 채 귀에 대고 물었습니다. "
이제 천국 가셔서 좋으시겠어요. 무섭지 않지요? 제 말 알아들으시면 손가락을 한번 움직여 보세요." 검지가 살짝 그의 손바닥을 스쳤습니다. "그동안 힘드셨지요. 이제 질병도 아픔도 슬픔도 없는 나라로 가시니, 제가 다 부럽습니다." 손가락이 다시 한번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숨이 멎었습니다.

그 순간 목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그 역사적인 자리에, 자신이 손을 맞잡은 채로 함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담히 "
하나님을 만나러 가니 좋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 자신이 기억하는 자기 인생은 고난과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를 열심히 믿었던 사람의 삶에서도, 고난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사람에게는 이상한 습성이 하나 있습니다. 남의 것은 늘 내 것보다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칙에 예외가 하나 있으니,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만큼은 언제나 내 것이 세상에서 제일 크게 느껴집니다. 바로 옆에서 태산에 깔려 신음하는 사람이 있어도, 내 손톱 밑에 박힌 작은 가시가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일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반갑지 않은 손님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면 누구나 통과해야 할 필수 관문으로 못 박아 놓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 썼고(롬 8:17), 베드로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벧전 4:12~13).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준 위로도 같은 결을 갖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 이 구절의 원어를 직역하면 '누구나 다 겪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성도에게 예외 없이 약속하신 것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바로 이 고난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거대한 풍랑에 흔들리는 배와 같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부유한 이들도 손실 앞에서 밤잠을 설칩니다. 얼마 전 독일의 한 부호는 자신의 재산이 1조 원으로 줄었다는 이유만으로 기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이 고난의 물결 앞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예외로 비켜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39장의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가장 사랑받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형들의 손에 팔려 애굽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생사여탈권조차 남의 손에 쥐어진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처지 속에서도 성실히 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살림을 도맡는 집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성경은 그의 외모가 출중했다고 전합니다.

그 준수한 외모와 성실함이 주인마님의 눈에 들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했다고 기록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두려워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직함이 그에게 돌아온 것은 상급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힙니다.

여기서 성경 기자는 뜻밖의 단어를 꺼내 듭니다. 노예로 팔리고, 유혹에 시달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이 모든 과정의 끝에, 성경은 담담하게 "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결론짓습니다. 영혼이 쇠꼬챙이로 뚫리는 듯한 그 고통의 시간 전체를, 성경은 '형통'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낯선 등식을 풀어주는 열쇠는 시편 105편에 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요셉의 형통이 담고 있는 뜻은 한마디로 '연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그는 그 말씀에 의해 단련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연단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요? 답은 요셉이 받은 계시 속에 있습니다. 야곱이 전한 언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9). 요셉이 삶으로 성취해가고 있던 계시는, 그가 만민의 섬김을 받는 자,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집사 생활과 옥중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인맥이 훗날 총리직을 위한 준비 과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시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민의 왕으로 서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요셉은 '애굽의 총리'라는 자리가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향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13년의 세월을 통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요셉은 자신의 죄 때문에 노예가 된 것도, 자신의 죄 때문에 옥에 갇힌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공격한 이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습니다. 형들의 죄는 그의 노예 생활로, 주인마님의 죄는 그의 옥중 생활로 대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을 종처럼 취급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덤벼드는 죄인들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신 '수난의 예수'의 모습이, 요셉의 생애 속에 미리 그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겪는 고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여기서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체인 성도들의 삶 속에 반복해서 재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은 고난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 백성의 탄생이라는 목적지를 향했던 것처럼, 성도의 고난 역시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놓인 사다리입니다.

야고보는 이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여기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본래 '연단이 되다', 곧 '목적한 자리에 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고난, 곧 시험의 목적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의도하신 만큼의 연단을 이루어내는 데에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애초에 고난이란 것은 왜 존재합니까?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 안에서 지어진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통치자로 다스리시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순종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관계를 스스로 끊어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 태도를 '교만'이라 부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하늘의 자원을 인간에게 공급하는 길을 닫으셨고, 인간은 그때부터 제한되고 유한한 자원만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 유한함이 결핍을 낳았고, 그 결핍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증상과 상태가 바로 고난입니다.

시간에 갇히고 자원이 유한해진 인간에게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인간은 다른 사람의 것을 탈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기하고, 다투고, 전쟁을 일으키고, 도둑질하고, 거짓을 말하고, 심지어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물질만이 아닙니다. 명성과 인기조차 빼앗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힘으로 빼앗을 수 없기에, 사람들은 상대를 모욕하고 험담하고 모함하여 결국 무너뜨립니다. 이 모든 행위가 고난이라는 열매를 맺는 씨앗이 됩니다.

'사이코패스'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뇌의 편도체 손상으로 공포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극단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본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 사람은 문득 소스라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그런 극단적인 사례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죄의 실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비추어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서로만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파괴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오존층과 숲과 강줄기를 서슴없이 훼손합니다. 그 결과로 쓰나미가 몰려오고, 허리케인이 인간에게 되돌아오고, 계절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가난, 질병, 전쟁, 자연재해, 집착, 중독, 이 모든 것이 결핍에서 비롯된 고난의 얼굴들이며, 결국 모든 고난은 인간 스스로가 불러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이 피할 수 없는 고난을 통과하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네 사람의 이야기가 그 답을 보여줍니다.

첫째, 고난은 죄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자리에서 용서를 배우게 합니다. 바바라 존슨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엔지니어 남편과 건장한 네 아들을 둔 독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어머니였습니다. 1966년, 남편이 교회 청년부 수련회로 먼저 떠난 뒤 아이들과 함께 뒤따라가던 그녀는, 수련회장 입구에서 뜻밖의 교통사고 현장과 마주쳤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둘째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전에 투입되었고, 4개월 만에 전사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 상실감에서 겨우 벗어날 무렵, 첫째 아들이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알래스카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여행길에서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고, 그 벅찬 소식을 전화로 어머니에게 알린 직후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뜻밖에도 주변 사람들의 위로였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일찍 데려가신 거야", "그래도 남은 아들이 있잖아" 하는 말들이 오히려 그녀의 상처를 더 깊게 찔렀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녀는 셋째 아들의 방에서 동성애 관련 서적과 사진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자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이 모든 일을 겪으며 그녀는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으로 숨쉬기조차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훗날 '모자에 제라늄을 꽂고 행복하라'라는 책을 쓸 수 있었을까요? 죽기 전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나는 나에게 그런 고난의 시간을 허락한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 모든 사건과 상황은 다 우리 인간의 죄가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라는 아이를 낳는 자리에, 바로 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으로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 깨달음에 이르자 자기 아들들을 그렇게 만든 이들까지도 용서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녀는 동성애 자녀를 둔 부모들의 상담자가 되었고, 음주운전으로 자녀를 잃은 이들과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바라 존슨의 고난은 그녀에게 죄의 실체를 깨닫게 했고, 용서와 화해와 섬김의 의미를 가르쳤으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더욱 굳게 다져주었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고난에서 얻은 연단이었습니다.

둘째, 고난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를 미리 보여줍니다. 고난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 남긴 흔적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은 하늘의 복을 거두셨고, 그 결핍이 오늘의 고난이라는 현실을 낳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려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의 고난 속에서 절절히 배운 것도 바로 이 진노의 무게였습니다.

지금 모든 인간은, 비유하자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에 앉아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차가 도중에 돌부리에 걸려 몇 차례 전복된다면, 그것은 분명 그 순간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돌진을 잠시 멈춰 세우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고난의 현장에서 우리는, 훗날 온 세상에 펼쳐질 진노의 심판을 미리 맛보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벌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연단입니다.

셋째, 고난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그런데 실제로 고난 앞에 서면, 사람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서운함과 불안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미국의 정치인 존 에드워즈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그랬습니다. 1996년, 그녀의 열여섯 살 아들이 지프를 타고 가다가 갑작스런 돌풍에 차와 함께 도로 밖으로 내동댕이쳐져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훗날 그녀 자신도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완치 판정 후 몇 년이 지나 암이 재발해 골반까지 전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한 매체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
저는 제 아들을 구해주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지금 암으로부터 저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분노와 체념이 뒤섞인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끝내 신앙을 떠나지 않았고, 이후로도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백성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배웁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20~21). 그러나 참된 성도는 그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것이 연단입니다.

넷째, 고난은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로마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부하다 화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서머나 총독 스타티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그와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는 원형 경기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폴리캅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를 한 번만 부인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폴리캅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우리 주님을 모른다 할 수 있겠는가?" 성난 군중이 그를 장작더미에 세우라 외쳤고, 결국 그는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화형대에 묶으려는 이들을 폴리캅이 도리어 저지했습니다. "
나를 그대로 두어라. 이 불을 견딜 힘을 주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묶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을 능력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오늘 이 시간 나를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오히려 형리들을 재촉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불에 타 죽는 순간에도 찬송하게 만드는 저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궁금해했다고 합니다.

르완다 내전 당시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반군의 표적이 되어 쫓기던 그리스도인들이 결국 붙잡혔을 때, 반군은 예수를 부인하고 자신들에게 합류하는 자는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본보기로 한 사람의 팔과 다리를 잘라 공포를 심었지만, 단 한 사람도 신앙을 버리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한 교회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반군은 총과 수류탄으로 그들을 몰살했습니다. 그 처참한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한 선교사는 "
이런 상황도 막아주지 못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학살의 현장에 있던 반군 장교 한 사람이 그날의 광경을 계기로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전해집니다.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놓지 않는 그들의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죄와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 결과 자신의 손에 못을 박았던 로마 백부장의 입에서 "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성도의 고난 또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주'라는 계시의 정점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고난을 통과하고, 마침내 형제들을 구원해내는 삶을 살았던 것은,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의 삶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완성되어가는 그 목적지를 향해, 고난이라는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져 갑니다.

그 길에 놓인 고난을 없애 달라고 구하는 것은, 사실 "
당신이 원하시는 목적지로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고난을 견딜 힘을 구하고, 그 안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 영광을 목격한 이들 가운데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들의 주가 되는 삶이며, 우리의 고난을 통해 형제들이 유익을 얻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요셉의 고난이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병실에서,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있던 목회자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스스로 느끼기에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 마지막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이상한 평안이 어려 있었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40년의 고난이 마침내 데려간 목적지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