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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창세기 - 형통이라는 이름의 안개 속에서, 에서의 형통을 조심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7.

창세기 36장 31~43절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32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33   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4   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5   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36   하닷이 죽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7   삼라가 죽고 유브라데 강변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8   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9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마드렛의 딸이요 메사합의 손녀더라
40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41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42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43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


한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은 사업에 손을 대는 족족 성공했습니다. 넓은 집, 좋은 차, 사람들의 인사와 부러움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동생은 평생 성실했지만 형편은 늘 빠듯했습니다. 몸이 약한 아내를 돌보고, 다달이 빠져나가는 대출 이자를 걱정하며, 예배당 구석 자리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종종 수군거렸습니다. "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사나. 오히려 안 믿는 형이 저렇게 잘되는데." 동생도 가끔은 그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밤늦게 창밖의 별을 보며 그는 묻곤 했습니다. "주님, 정말 저를 사랑하시는 게 맞습니까?"

창세기 36장은 바로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본문입니다. 언뜻 보면 이 장은 지루한 족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돔 땅을 다스렸던 여덟 왕의 이름, 그들의 도성, 그들의 족속, 그러나 이 족보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 그 행간에서 아주 오래된 질문 하나가 떠오르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에서의 후손은 이렇게 화려하게 번성하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야곱의 후손은 그토록 오래 종살이와 광야를 지나야 했는가입니다.

포르투갈의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그림을 그려 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실명 바이러스가 도시 전체를 덮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 시력을 잃고, 결국 도시 전체가 눈먼 자들의 세상이 됩니다.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한 여인만이 시력을 잃지 않습니다. 그녀는 눈이 먼 남편을 지키려고 자신도 눈이 먼 척 위장하고, 격리 수용소로 스스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 수용소 안에서 그녀가 목격한 것은 처참했습니다. 사람들은 위생도 도덕도 잃어버린 채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눈먼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자는, 다름 아닌 원래부터 눈이 멀어 있던 한 소경이었습니다. 그는 지팡이 하나로 마치 앞을 보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수용소를 장악했고, 폭력과 협박으로 물자를 독점했습니다.

그가 손에 쥔 것이라야 정부가 배급하는 낡은 음식 상자 몇 개, 쓸모없는 패물, 약간의 현금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빌붙어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소경 무리는 그것을 인생 최고의 풍요라 믿고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오직 눈을 뜬 여인만이 그 광경 앞에서 구역질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그들이 자랑하는 부와 권력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벌어지는 초라한 잔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라마구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마 이 세상의 축소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본질적으로는 눈먼 자들의 도시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늘의 참된 풍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손에 쥘 수 있는 권력과 명예와 재물을 인생 최고의 성취로 여기며 거들먹거립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을 아는 눈으로 보면, 그것은 낡은 권총 한 자루를 최고의 무기라 믿는 소경의 착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뜬 사람들을 성도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자리는 분명합니다. 세상이 자랑하는 그 가난한 풍요를 부러워하며 함께 뒹구는 자리가 아니라, 눈을 뜬 여인처럼 그 참상을 직시하고, 동시에 그 무리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창세기의 두 형제의 이야기에서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이삭이 그에게 선포한 축복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8~29)

반면 에서에게 주어진 말은 초라했습니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창27:39~40) 말씀만 놓고 보면 야곱이 훨씬 잘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야곱의 후손은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 종살이했습니다.

그동안 에서의 후손은 에돔 땅에 독립 왕국을 세우고 여덟 대에 걸쳐 왕위를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열된 벨라, 요밥, 후삼, 하닷, 삼라, 사울, 바알하난, 그리고 또 다른 하닷까지, 이 화려한 왕들의 계보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외삼촌 라반의 종노릇을 하던 그 시절, 에서는 세일 산지에서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가신 사백 명을 거느린 세력가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조리 앞에서 성경의 다른 인물들도 똑같이 휘청거렸습니다. 시편 73편의 시편 기자 아삽은 악인들이 살쪄서 눈이 튀어나올 만큼 형통한데, 자신은 온종일 재앙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계를 받는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예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1:13)

시편 기자 아삽이 던진 질문에는 그러나 반전이 있습니다. 그는 형통해 보이는 악인의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 집이 미끄러운 곳에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견고하고 화려해도, 그 땅 자체가 기울어져 있어 언젠가는 반드시 미끄러져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이 이미지를 조금 더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겨울철 언덕 위에 지어진 두 채의 집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집은 화강암 위에, 다른 한 집은 눈이 살짝 덮인 얼어붙은 흙 비탈 위에 지어졌습니다. 눈 덮인 비탈의 집이 당장은 더 반듯하고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봄이 오고 눈이 녹기 시작하면, 그 땅은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반면 화강암 위의 집은 계절이 바뀌어도 그 자리를 지킵니다.

다윗은 이 진실을 알았기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라."(시37:1~2) 하박국이 던진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2~4) 악인의 득세는 봄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의인은 그 더딤을 견디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곧바로 완성된 복을 부어 주시지 않고, 이토록 더딘 기다림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복'이라는 단어 자체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미식가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정찬 코스를 예약했다고 합시다. 식당 문 앞에는 그날의 메뉴를 알리는 작은 시식 접시가 놓여 있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빵 조각에 소스를 살짝 얹은 정도입니다. 그 맛보기를 먹고 감탄한 손님이, "
이것으로 충분하다"며 정작 안에 들어가 본식을 먹지 않고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그는 그 레스토랑이 준비한 진짜 만찬을 영영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반은총'이 바로 이 시식 접시와 같습니다. 태양과 공기와 물, 수확의 기쁨과 가정의 평화, 심지어 형통과 재물까지도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값없이 흘려보내시는 복의 전체 중 지극히 작은 부분들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떠난 이후 인간은 본래 완전한 복을 누릴 자격을 잃었지만, 하나님은 세상이 자멸하지 않도록, 그리고 택하신 백성이 구원에 이르는 그날까지 세상이 유지되도록, 이 견본품 같은 복을 아낌없이 남겨 두셨습니다.

에서가 누린 그 화려한 형통도 바로 이 견본품이었습니다.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시식 접시를 인생 최고의 만찬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야곱에게 약속된 복은 이 시식 접시가 아니라 본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본식은 이 땅에서의 즉각적인 형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온전히 성취될 약속이며, 지금은 오직 믿음으로만 맛볼 수 있는 영적 풍요와 안식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신비를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히11:20) 이삭은 본래 에서를 축복하려다 속아서 야곱을 축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 일을 "믿음"이라 부릅니다. 그 말은 이 축복의 진짜 주체가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실수를 뚫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윗 왕 때 에돔은 마침내 이스라엘을 섬기는 나라가 되었고(삼상8:13~14), 이후 여러 차례 저항과 잠깐의 독립을 거쳐(왕상11:14, 왕하16:6) 결국 완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렇게 몰락한 에돔 사람 가운데 '헤롯'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등장해,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세상을 떠난 지 팔백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더딘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한 점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 시식 접시를 본식이라고 속여 파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와 고린도 교회에 그토록 격렬하게 경고했던 '다른 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9)

당시 교회 안에 스며든 다른 복음의 정체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 곧 십자가의 은혜에 자신의 노력과 열심을 보태려는 시도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이 세상과 육신을 저급한 창조신이 만든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오직 선택된 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신비한 지식(그노시스)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라졌습니다. 한쪽은 "
육신은 어차피 악한 것이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방종한 무율법주의자가 되었고, 다른 쪽은 "나 같은 고귀한 사람이 어찌 저급한 쾌락을 좇겠는가"라는 극단적 금욕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두 태도의 뿌리는 같았습니다. 자신을 선택된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교만이었습니다.

이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고린도 교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의 부와 영적 지식을 자랑하는 기이한 공동체가 되어 갔습니다. 원래 사도행전 4장의 초대 교회는 서로의 것을 내어놓아 가난한 자가 없는 평등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다른 복음이 스며들면서, 교회는 점점 세상의 성공과 힘을 자랑하는 자리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바울은 이 흐름에 맞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세웁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 여기서 '생활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폴리튜오마이'는 본래 정치적 용어로, "
한 나라의 시민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흥미롭게도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 자체도 본래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즉위,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정치적 선포에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로마의 복음은 강한 자가 힘으로 세상을 정복했을 때 선포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 안에 들어온 다른 복음이 실은 이 '로마의 복음'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힘으로 약자를 밟고 올라서는 로마의 시민이 아니라, 십자가를 붙든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로마의 복음 아래서는 고난이 결코 특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고난조차 감사히 받아 낼 수 있는 특권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고 사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바울은 그 답을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으로 제시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야곱의 삶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는 본래 에서보다 더 큰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약속의 후사였지만, 그 풍요를 이 땅에서 당연한 전리품으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광야와 종살이라는 낮은 자리를 지나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시골에서 소 두 마리로 밭을 갈아 본 사람은 이 원리를 몸으로 이해합니다. 겨릿소라 불리는 이 방식에는 안소와 마랏소가 있습니다. 왼쪽에 서는 안소는 경험이 많고 사람의 말귀를 알아들어 거의 모든 일을 이끕니다. 오른쪽의 마랏소는 아직 서툴러서, 안소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배웁니다. 마랏소가 가끔 걸음을 헛디뎌 안소의 일에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동행 자체가 안소에게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대신 사시는 예수님이 바로 이 안소와 같습니다. 우리는 능력도 없고 자주 넘어지는 마랏소지만, 그분의 걸음을 보며 배우고, 그 걸음에 발을 맞추며 조금씩 성숙해 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나는 능력도 없고 불가능한 사람이니 더는 못 가겠다"며 주저앉아 버릴 때입니다. 그러면 안소 되신 예수님도 함께 멈추어 서게 됩니다.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주님께 걸림돌이 되는 삶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면, 어쩌면 그 은혜를 진짜로 맛본 적이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의 이야기에서 형은 여전히 사업이 번창했고, 동생은 여전히 빠듯한 살림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동생은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부러워했던 형의 풍요란, 결국 시식 접시 위의 빵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형의 웃음 뒤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불안이 있었고, 그가 쌓아 올린 것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미끄러운 땅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생의 삶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안식이 있었습니다. 힘든 형편 속에서도 그는 밤마다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그 무릎 꿇음 속에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평안을 하늘의 참된 복이라 부릅니다. 에서의 형통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받게 될 참된 복의 아주 작은 견본품일 뿐입니다. 성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형통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낮추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자기부인입니다. 서툴지만 성실한 마랏소로, 안소 되신 주님의 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이 오래된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초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