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세기 32:28)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는 영화가 있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 영화의 본 사람은 마지막 장면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거꾸로 도는 커다란 시계 위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던 장면이었습니다. 노인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점점 젊어지다가 결국 아기가 되어 죽는 벤자민 버튼, 모든 사람의 시계는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데, 그의 시계만은 거꾸로 갑니다.
'우리 성도들의 시간도 사실은 저렇게 거꾸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시간이 과거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흘러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미지의 미래를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노력으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전력질주를 합니다. 그들에게 시간의 주인은 인간 자신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시간관은 다릅니다. 우리의 미래는 이미 창세전에 확정되었고, 그 확정된 미래가 과거로, 곧 지금 우리의 삶으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흘러내리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배우며, 감탄하면서 걸어가는 존재입니다. 이 이야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밤새도록 씨름했던 그 밤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가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대부호 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유언장에 아이의 이름을 또렷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 아이에게 나의 모든 것을 물려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채 가난한 뒷골목에 버려집니다. 그리고 그 뒷골목에서 도둑질과 거짓말을 배우며 자라납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요? 뒷골목의 도둑입니까, 아니면 대부호의 상속자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답은 이렇습니다. 아이의 '확정된 신분'은 상속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도둑의 누더기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반드시 그 아이를 찾아와서, 그 누더기를 벗기고 상속자의 옷을 입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 있어 그 아이가 뒷골목에서 누더기를 입은 채 만족하며 사는 모습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 어머니의 복중에 지어지기도 전인 영원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복 받은 자'라는 확정된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 입고 나온 옷은 '속이는 자, 강도'라는 뜻의 이름, 야곱이었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벗어야 할 그 옷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 낱낱이 기록합니다. 형이 사냥에서 돌아와 배고파 쓰러지려 할 때, 야곱은 그 배고픔을 이용해 장자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에 사들입니다. 마치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에게 "치료해 줄 테니 대신 당신 집 문서에 도장 찍으시오"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짓입니다. 늙어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에게는 염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형인 척 속여 축복을 가로챕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나서도 그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다 라반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눈치채자, 인사 한마디 없이 야반도주를 감행합니다. 하필 그때는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나간 때였습니다. 당시 목축업자에게 양털 깎는 시기는 일 년 농사를 추수하는 것과 같은 큰 행사였습니다. 몇 날 며칠을 준비해 온 가족과 종들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바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기 소유를 모두 챙겨 도망쳐 버립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도주 길에 아내 라헬이 친정집의 수호신 드라빔을 훔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드라빔은 단순한 우상이 아니라 재산 상속권을 입증하는 증거물이었습니다. 라반이 삼일 밤낮을 쫓아온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경은 왜 하필 이 장면에 아내의 허물을 함께 그려 놓았을까요? 부부는 한 몸입니다. 라헬의 소행은 곧 야곱의 소행이고, 야곱의 소행은 그가 대표하는 이스라엘, 곧 오늘의 교회의 실상입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남의 아이디어를 슬쩍 자기 것으로 포장한 적은 없습니까? 가족 모임에서 유산 문제로 형제와 다투며 서로의 흠을 들추어낸 적은 없습니까? 정직하게 손해 보느니 적당히 눈감고 이익을 챙기는 쪽을 택한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것도 은근슬쩍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야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정말 놀라운 부분은 야곱의 악함이 아니라, 그런 야곱을 끝까지 쫓아다니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라반이 삼일 만에 야곱의 무리를 따라잡았을 때, 야곱은 그야말로 끝장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밤, 하나님이 먼저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경고하십니다. "야곱을 건드리면 네가 죽는다." 일을 저지른 것은 야곱인데, 뒷수습은 하나님이 하고 계십니다.
이어서 야곱이 다시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납니다. 그는 그 광경을 보고 그곳을 '마하나임', 곧 '하나님의 군대'라 이름 짓습니다. 여기서 쓰인 '만나다(파가)'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의도적으로 끈덕지게 부딪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연히 야곱과 마주친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집요하게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자녀가 집을 나가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아버지는 화를 내며 포기하는 대신 계속 뒤를 밟으며 빚쟁이를 대신 만나 무마시키고, 위험한 곳에 미리 사람을 보내 자녀를 지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여전히 제멋대로 살아가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한순간도 그 아이에게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은, 자기를 지키는 하나님의 군대를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다시 자기 꾀를 씁니다. 종자와 가축을 두 떼로 나누어 한쪽이 당하면 다른 쪽은 피하게 하려는 계산이었습니다. 기도도 합니다. "주께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그러나 그 기도 후에도 그의 진짜 관심사는 여전히 자기 재산과 자기 가족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민낯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면서도, 정작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의 진짜 관심사는 나의 계획, 나의 야망, 이 세상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저 내 뜻을 이루어 주는 조력자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마침내 그날 밤, 야곱은 가족과 재산을 모두 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가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그와 씨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끈질기게 매달리면 하나님도 결국 들어주신다'는 강청기도의 모범 사례로 오해합니다. 마치 부모를 조르고 졸라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아이처럼, 야곱처럼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의 마음도 결국 돌아선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이 사건을 전혀 다르게 인용합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호12:3~4) 호세아는 이 이야기를 끌어와 오히려 이스라엘의 신앙적 실패와 패역함을 꾸짖습니다. "너희가 왜 하나님께 덤비느냐"는 책망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소원과 야망을 하나님과 씨름해서 관철시킨 승리의 사건이 아니라, 야곱의 야망과 하나님의 뜻이 결코 함께 갈 수 없어서 결국 정면으로 충돌해 버린 위기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되짚어 보면 야곱의 인생 전체가 그러했습니다. 그의 진짜 싸움은 형 에서와의 싸움도, 외삼촌 라반과의 싸움도 아니었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하나님과, "내 뜻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야곱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평생을 관통한 진짜 씨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씨름은 그 밤 이후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세겜에 머물다가 딸이 강간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습니다.
그러고도 가족들이 우상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허용합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이 씨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크고 작은 순간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는 삶을 되풀이합니다.
밤새 씨름해도 승부가 나지 않자, 그 이는 야곱의 엉덩이뼈, 곧 환도뼈를 치십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환도뼈는 사람의 전인격을 상징하는 부위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죄인으로서의 야곱, 그 전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정작 죽은 것은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을 붙들고 씨름하신 그분, 곧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마치 두 사람이 씨름을 하다가 상대가 쓰러지기 직전, 스스로 바닥에 등을 대며 패배를 자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지시는 방식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바로 골고다 십자가의 그림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승리를 자축한 그 자리, 겉으로는 하나님이 패배하신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에 오히려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창세전에 택함받은 야곱과 같은 이들이, 바로 그 십자가 자리에서 함께 죽고 사흘 만에 새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동이 트고 야곱은 브니엘을 지나며 절뚝거리며 걷습니다. 환도뼈가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완전히 패배한 흔적, 그 다리를 절며 걷는 걸음이야말로 진짜 승리의 증표였습니다.
씨름이 끝날 무렵, 그가 야곱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은 대답합니다. "야곱입니다." 곧 '속이는 자, 강도'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있는 그대로 실토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선언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32:28)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흔히 굉장히 영광스럽고 대단한 이름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뜻을 정직하게 풀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 했던 자." 이것은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사실 몹시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대단히 잘나거나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끝까지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짓밟으려 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찾아와 완성해 낸, 겸연쩍고 낯 뜨거운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평생 이 사실을 폭로당하고, 확인하고, 인정하며 삽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절름발이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신앙고백입니다. 야곱이 평생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걸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인생의 지팡이이신 하나님 없이는 단 한 걸음도 옳게 내디딜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이렇게 토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이 신호 위반을 하는데 왜 하필 저만 걸릴까요? 다른 사람들도 다 세금 좀 눈감아 주는데 왜 하필 저한테만 이렇게 꼼꼼하게 따지실까요?" 살다 보면 유독 나만 작은 흠까지 낱낱이 들추어지는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걸어오시는 씨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자녀로 입양하셨기에, 이미 확정해 놓으신 그 자녀다움을 우리 안에서 찾아내시려고, 우리가 걸치고 있는 더러운 옷을 하나씩 벗겨가고 계신 것입니다.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느냐고, 왜 나만 이렇게 재수가 없느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원망이 나오면 원망해도 좋습니다. 다만 그 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고만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그런 우리를 순종과 사랑의 자리로 빚어 가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복 받기로 확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복이란 것이,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영생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고단하게 만듭니다. 내가 부인해야 할 그 '나'가 나의 피와 살과 뼈 속에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기부인은 성도에게 필연입니다. 당신의 야망을 부인하고, 당신의 욕심을 부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지팡이 없이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절름발이 이스라엘임을 인정하며, 그 지팡이를 붙드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께 포기란 없습니다. 항복하고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은 이 씨름에서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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