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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세겜과 벧엘 사이 - 얍복강 이후의 성도의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창세기 33:10~11,20)

야곱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형이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의 계산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그는 밤새 가축 떼를 몇 무리로 나누어 형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했고, 마지막에는 자기 가족들마저 순서를 매겼습니다. 여종과 그 자식들을 맨 앞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다음에,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세웠습니다. 누가 먼저 죽어도 되는 사람인지,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형이 다가오자 벌어진 일은 야곱의 계산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에서는 칼을 뽑지 않았습니다. 대신 달려와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두 형제는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십 년 전, 장자권을 빼앗기고 축복까지 도둑맞아 이를 갈며 "
아버지의 죽을 날이 가까웠으니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다짐했던 그 에서가,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한 목회자가 이야기 한 것이 떠오릅니다. 그분이 젊은 시절 사역하던 교회에, 이십 년 넘게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두 집사님이 계셨답니다. 사업 문제로 틀어진 사이였는데, 한 분이 암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식을 들은 상대편 집사님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십 년의 원한이 그 순간 녹아내렸습니다. 나중에 그 목회자가 병문안을 갔을 때, 회복하신 집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
목사님, 그 사람이 저를 미워한 게 아니었어요. 저희 둘 다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던 거죠."

에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스무 해 전 야곱을 죽이겠다고 다짐했던 그 마음은, 사실 야곱 개인을 향한 증오라기보다는 자신이 빼앗긴 것에 대한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십 년의 세월과 각자의 삶이 그 아픔을 다른 방식으로 가라앉혀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보입니다. 에서는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에서는 그 땅에서 이미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백 명의 사병을 거느릴 정도의 부와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러 나갈 때 동원한 가신이 삼백십팔 명이었으니, 에서의 세력은 그보다도 컸던 셈입니다. 야곱이 미안한 마음에 엄청난 가축 떼를 선물로 보냈을 때, 에서는 "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 하고 대범하게 사양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에서는 완벽한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를 주인공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창세기 전체 흐름에서 에서는 결국 야곱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가, 자기 갈 길인 세일로 떠나고, 다시는 중심 무대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 역사의 주연이 아니라, 야곱이라는 한 사람이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잠시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조연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젊었을 때 회사에서 유능한 동료에게 늘 밀려 승진에서 누락되곤 했습니다. 그 동료는 인맥도 좋고 처세도 능해서, 그분 눈에는 늘 승승장구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권사님은 그 동료를 볼 때마다 열등감과 원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은퇴할 즈음, 권사님은 문득 깨달았답니다. "
그 사람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었구나. 나는 늘 그 사람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는데, 사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신 것은 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 열등감과 원망 속에서도 하나님만 붙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구나."

그 권사님의 말처럼, 우리 인생에도 유난히 눈에 띄고 부러운 '에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인생의 기준점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무대에 잠시 등장한 장치일 뿐, 하나님이 목표하시는 진짜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 즉 하나님의 은혜로 빚어져 가는 그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에서가 갑자기 마음이 바뀐 것은 결코 그 자신의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름발이가 된 그 순간, 그의 인생을 가로막던 대적의 문제도 함께 해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려 합니다. '저 사람이 문제야. 저 사람이 바뀌어야 해.' 그래서 어떻게든 상대를 설득하거나, 압박하거나, 우회로를 찾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순서는 정반대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서져야 할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결혼 십오 년 차 되던 부부였는데, 남편의 무뚝뚝함과 무관심 때문에 아내가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아내는 수도 없이 남편에게 "
제발 좀 바뀌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남편은 도무지 변할 기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큰 병을 얻어 병상에 눕게 되었고, 그 기간 동안 아내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남편을 바꾸려고만 했지, 정작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는지는 돌아보지 않았구나."

그 깨달음의 시간을 지나면서, 놀랍게도 남편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원망을 내려놓고 남편을 향한 시선이 부드러워지자, 남편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내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제가 바뀌니까 남편의 문제도 풀리기 시작하더라고요. 하나님은 저를 먼저 다루고 싶으셨던 거예요."

야곱과 에서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자기 자신의 실체인 하나님 없이는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가로막던 에서라는 벽도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원수 같은 남편, 바뀌지 않는 자녀, 골치 아픈 동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변하기를 구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서져야 할 부분은 없는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세겜, 벧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곳
이야기는 여기서 아름답게 끝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냉정하게 다음 장면을 보여줍니다. 에서와 화해한 야곱은 형이 세일로 떠나자, 곧바로 반대 방향인 숙곳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간 머물다가 다시 세겜으로 옮겨가 그곳에 땅을 사고 제단을 쌓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명령하신 곳은 세일도 숙곳도 세겜도 아닌, 벧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겜은 벧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지도를 펴 놓고 보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벧엘과 비슷한 곳'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정확히 '벧엘'을 원하셨습니다. 야곱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도 괜찮잖아. 여기서도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면 되지, 하나님이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어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대학 시절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일에 늦잠을 자거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예배를 인터넷 중계로 대신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처음에는 "
이번 주만" 하다가, 나중에는 "요즘 다 이렇게 산다"는 말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다시 교회에 정착하려 했을 때,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저는 벧엘 근처 어딘가에서 계속 서성이고만 있었던 거예요. 벧엘에 도착한 게 아니라요."

우리 시대에는 이런 '세겜'이 참 많습니다. 인터넷으로 예배 영상만 시청하고 실제 교회 공동체와는 멀어진 채 지내는 삶, 설교는 유튜브로 골라 듣고 정작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의 부족함은 견디지 못해 발길을 끊는 삶, 이런 것들이 바로 벧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세겜에 머무는 모습입니다. 편리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확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굳이 '모이는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토록 고집하시는 것일까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성령이 계시고, 혼자서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어느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분이 젊은 시절 개척한 작은 교회에, 아내에게 억지로 끌려온 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맨 뒷자리에 앉아서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찬양이 시작되고 회중이 함께 부르는 그 소리,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진심 어린 기도 소리, 그리고 말씀이 선포되는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배가 끝난 후 그는 목사님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
저는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앉아 있으니, 뭔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땅의 지역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툼도 있고 실수도 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모임 속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임재의 능력이 있습니다.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그 약속은, 혼자 있을 때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감싸 안습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한 출판업자에게 남긴 말이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선포된 설교가 부흥의 열매를 맺는 것과, 그것이 활자로 옮겨진 후의 효과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 현장에는 천둥과 지진과 무지개와 바람이 담겨 있지만, 그것이 종이 위로 옮겨지는 순간 그 생명력은 박제된 표본처럼 굳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화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모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세겜에 안주한 지 여러 해가 지나, 마침내 참혹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딸 디나가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겁탈을 당하고, 격분한 아들들이 그 성 사람들을 속여 몰살시키는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을 떠날 때 일곱 살이었던 디나가 결혼 이야기가 오갈 나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야곱은 최소 칠 년 이상을 벧엘이 아닌 곳에서, 자기 뜻대로 머물러 있었던 셈입니다.

이 사건은 참으로 아프고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을 통해 하나님은 마침내 야곱을 벧엘로 불러 올리십니다. 더 이상 세겜에 머물 수 없게 된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이 처음부터 명하셨던 그 자리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느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
나중에, 나중에" 하며 신앙의 결단을 미루던 분이었습니다.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자녀 교육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뒤로 미루셨습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와 가정의 위기를 동시에 겪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그 위기가 없었다면 저는 평생 세겜에서 서성이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국 저를 벧엘로 밀어 올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돌이키지 못할 때, 때로는 아프고 힘든 사건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그 정확한 자리로 이끌고 가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세겜을 만납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여기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잖아' 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게으름과 타협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벧엘 근처의 세겜이 아니라, 정확히 벧엘이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메시지입니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위로도 줍니다. 야곱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계산하고 타협하고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프고 더딘 길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은 야곱을 벧엘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겜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다시 예수라는 지팡이를 붙잡는다면,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벧엘에 당도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