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창세기 35:3,10~12)
한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반듯한 집을 짓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었습니다. 못 하나도 삐뚤게 박지 않았고, 나무 하나도 결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이 무너지지 않기를, 그래서 사람들이 "저 사람은 실패 없는 목수였다"고 기억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는 이상하게도 무너지는 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정성껏 지은 집에 금이 갔고,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그는 밤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제 인생은 자꾸 무너집니까?"
그런데 그가 늙어서야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무너지지 않는 집이 아니라, 무너짐 앞에서 무릎 꿇는 목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실패를 통해 그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손을 의지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읽을 야곱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5장, 야곱은 드디어 벧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곳입니다. "어서 베델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창35:1). 그런데 이상한 질문 하나를 던져봅시다. 벧엘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 땅이었을까요? 혹시 그 땅에 신령한 기운이 서려 있었을까요, 아니면 유난히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만약 벧엘이 그런 신비한 땅이었다면 야곱은 죽을 때까지 그 땅을 떠나서는 안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야곱은 그 후 애굽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칩니다. 벧엘이 아니라 애굽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야곱을 벧엘로 몰아 올리셨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벧엘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치던 날, 하나님이 그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언약을 맺어주신 자리였기 때문입니다(창28장). 그날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이 땅으로 너를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벧엘 자체는 특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언약하신 장소였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결혼반지가 그 자체로 값비싼 보석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서약의 증표이기 때문에 평생 소중히 여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당신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 눈물로 기도했던 자리, "이제부터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자리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 언약의 자리로 밀어 올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곱이 그 언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벧엘의 약속을 받은 후에도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자기 힘과 꾀로 살았고, 심지어 벧엘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도 세겜에 머물며 자기 계획대로 정착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만납니다.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이 우리의 옛 자아와 벌이시는 전쟁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랬듯, 우리 안에는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본성이 있습니다. 누군가 내 인생을 통제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그것이 죄인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그 자아와 전쟁을 하십니다.
어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한 대로 살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학도, 직장도, 결혼도 모두 자신의 치밀한 계획표대로 이루어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 갑작스러운 병을 얻고 모든 계획이 무너지던 날, 그녀는 병상에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저는 평생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제가 제 인생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병이 저를 처음으로 진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나'라는 우상을 무너뜨려야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말합니다(엡4:22~24). 이것은 이미 완료된 사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는 표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이미와 아직'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합시다. 시민권 자체는 그 순간 완전히, 법적으로 확정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와 생활방식에 완전히 익숙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시민권(신분)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실제 삶(경험)은 아직 완성되어가는 중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녀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넘어지고, 실수하고, 옛 습관과 씨름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짜 성도라서가 아니라, 진짜 성도이기 때문에 겪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이 진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는 흔히 바울을 위대한 사도, 성공한 선교사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가 직접 쓴 글을 읽어보면 그림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 번 매를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했으며,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태장을 세 번, 돌로 맞기를 한 번, 세 번 파선하여 하루 밤낮을 깊음에서 지냈다"(고후11:23~27 요약).
겉으로 보면 이것은 저주받은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불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의 모습과 바울의 인생이 놀랍도록 겹칩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저주받고, 질병에 시달리며, 가진 것을 빼앗기고, 조롱거리가 되는 삶, 이것이 신명기가 말하는 저주받은 자의 삶이자, 동시에 하나님께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사도 바울의 실제 삶이었습니다.
바울의 말년은 더욱 처절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나와 함께한 자들이 다 나를 버렸다. 어서 내게로 오라. 겨울이 오기 전에 오라. 감옥 안이 몹시 춥구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노 사도의 마지막이 철저한 버려짐과 추위와 외로움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이자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다는 것이 이 땅에서 성공하고 인정받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삶으로 살아낸 근대의 인물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입니다. 그녀는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발각되어 가족과 함께 나치의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언니 베시가 그녀의 눈앞에서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코리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수용소에서의 그 지옥 같은 시간 동안, 그녀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내 인생을 성공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만날 수 있는 분'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가 들끓는 담요, 매질, 굶주림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했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깊이 경험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는 자신을 학대했던 간수를 실제로 용서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녀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 힘으로는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내밀자, 하나님이 내 팔을 통해 그 사랑을 흘려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도 은사다'라는 말의 실제 모습입니다. 코리 텐 붐은 자기 힘으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철저히 무력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력함의 자리에서,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에서, 벧엘로 올라가기 직전, 야곱은 놀라운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35:2). 그러자 가족들은 자신들이 몰래 지니고 있던 우상과 귀고리들을 가져와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옷을 갈아입습니다.
여기서 '귀고리'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당시 우상숭배와 연결된 부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다른 신들에게 안전을 의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예배당에서는 "주님만 의지합니다" 찬양하면서, 정작 마음 한구석에서는 통장 잔고와 인맥과 스펙에 안전을 의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을 땅에 묻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사방에 있는 모든 성읍 사람을 두려워 떨게 하셨으므로, 아무도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창35:5). 그들을 위협하던 모든 것들이 잠잠해진 것입니다. 우상을 묻는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우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붙잡고 있던 자기 확신, 자기 계획, 자기 능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기 시작하십니다.
벧엘에 도착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창35:11).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 창세기 1장, 하나님이 아담에게 처음 주셨던 명령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 그런데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아담에게 "네가 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벧엘에서는 똑같은 내용이지만 주어가 바뀝니다. "내가 이루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은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명령'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성취해야 할 율법이었고, 결국 인간은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선악과 사건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약속은 다릅니다. 인간의 실패를 전제로,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주시겠다는 은혜의 약속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며 "네 힘으로 이 언덕을 올라가 보렴" 하고 시험했다고 합시다. 아들은 몇 걸음 못 가 주저앉아 웁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다가와 짐을 대신 짊어지고 아들의 손을 잡으며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데리고 올라가마." 아담에게 주신 명령이 전자라면, 벧엘에서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후자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자주 잊어버립니다. 여전히 "내가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내가 더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실패가 드러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내가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이야기는 성전의 역사를 통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성읍 동편 산에 머뭅니다(겔11:23). 율법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 에스겔은 그 영광이 새로운 성전으로 돌아오는 환상을 봅니다(겔43장).
이 모형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바로 성전 동편 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마주 보고 앉으시며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그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이 향단에서 제사를 드리던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율법과 제사의 체계를 그 순간 완전히 무효화시키신 것입니다.
옛 성전 안에서 유일하게 정사각형 모양이었던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역시 정사각형으로 묘사됩니다(계21:16). 마치 지성소가 성전 전체를 삼켜버린 형국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온 우주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지성소가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이 따로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진짜 새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된 그분의 백성 자체인 것입니다.
처음의 목수 이야기에서 그는 평생 실패 없는 집을 짓기 원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은 계속되는 무너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을 통해 그는 마침내 자신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신의 인생에도 벧엘로 가는 길에 세겜과 숙곳과 하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관계, 실패한 사업, 이루지 못한 꿈, 반복되는 죄와의 씨름, 그 모든 것 앞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다른 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나무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벧엘로, 진짜 언약의 자리로 밀어 올리시기 위해 그 모든 과정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풍랑과 큰 물고기로 그를 다시 빚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실패한 자를 탈락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당신 안에 남아 있는 상처와 실수와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며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벧엘로 이끄시는 도구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은사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열심을 내시며 씨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의 남은 자아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항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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