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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창세기 - 라헬의 눈물, 그리고 그 눈물을 닦으신 아기, 산고 끝에 피어난 은혜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0.

창세기 35장 16~29절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창세기 35:18~19)


몇 해 전, 어느 목사님이 성도님 댁의 심방을 갔다가 우연히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첫 아이를 낳던 날, 진통이 열두 시간을 넘어가는데도 아이가 나오지 않아 결국 응급 수술실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되시는 분은 수술실 앞 복도에서 두 시간을 서성이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
하나님,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아이도, 아내도." 그리고 수술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나왔을 때, 그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고 하셨습니다. 기쁨의 눈물이자, 동시에 안도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35장의 라헬입니다. 그녀는 그 진통의 끝에서 아기의 얼굴을 보긴 했지만, 정작 자신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산파가 "
두려워하지 마셔요, 또 아들을 낳으셨어요"라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 순간에도, 라헬은 숨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아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얼마나 절망스러웠으면 갓 태어난 아들에게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그 이름을 바꿉니다.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짧은 장면 속에, 우리 신앙의 가장 깊은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으로 시작된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영광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어떤 예수를 원합니까? 기도하면 사업이 잘되고, 건강이 회복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는, 그런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눈앞에 주어지면 "
이게 바로 축복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다"라고 감격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부인, 십자가를 지는 삶, 손해 보고 낮아지는 삶, 그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 나타나면 우리는 곧바로 그것을 '지옥'처럼 느낍니다.

요한복음 6장에도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의 배를 채워주시자,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떡'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정색하며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 따위는 관심 없었던 것입니다.

몇 해 전, 한국 최고의 재벌가 자녀가 이혼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재산이 약 1조 원에 이르는 그분과, 역시 굴지의 재벌가 출신인 배우자는 재산 분할로만 5천억 원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최고 명문대를 나왔고,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예쁜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그 사람들이 "
이 상태로는 행복하지 않다"며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풍성한 떡을 쌓아 올려도, 그것으로는 결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공허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돈과 명예와 인기를 가진 유명인들이 왜 술과 약물의 힘을 빌리는지, 당신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이 가진 것이 그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세상의 처방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6:14)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마취제만 놓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일입니다. 진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 계속해서 떡만 입에 넣어주면서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 문제로 실족할 뻔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쓴 아삽입니다. 그는 성전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악인들은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고통도 없이 잘 사는데, 정작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은 종일 재앙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계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73:2~3)

그런데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진실을 깨닫습니다. 화려하게 형통하던 악인들의 삶이 실은 파멸을 향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는 것을(시73:18~19), 그리고 자신의 고난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친히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영광으로 맞아주시는 삶이었다는 것을(시73:24~25)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시73:28) 세상의 힘을 얻고 사람들의 인기를 누리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다시 라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라헬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조금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그녀가 신실했다거나, 마음이 착했다거나,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무서운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언니 레아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시기했고, 심지어 친정을 떠나올 때는 아버지 라반 집의 우상 드라빔을 몰래 훔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라헬입니다. 그런데 이런 라헬이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에게 '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존경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의 자격이나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야곱이라는 신랑이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이야기와 같습니다. 어느 결혼식 주례를 서다가 신랑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왜 이 사람과 결혼하기로 하셨습니까?" 그러자 신랑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완벽한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도 그러했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신부가 된 것입니다.

이 원리는 룻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고, 남편을 잃은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개 취급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보아스라는 유대인 지주를 만나 결혼하면서, 다윗의 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룻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룻4:11)

라헬과 레아가 그러했듯, 룻도 자기 능력이 아니라 신랑의 선택으로 언약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 리브가, 라헬, 이스라엘의 조상을 낳은 세 여인 모두 원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여인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가능성이 전혀 없던 사람들에게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자녀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라헬은 아이를 낳자마자 죽어야 했을까요? 저는 여기에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깊은 비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헬은 신랑에게 선택받아 신부가 되었지만, 여전히 질투하고 거짓말하는 옛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라헬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시기하고 넘어지고 실수하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낳은 아들, 곧 이스라엘의 완성을 상징하는 그 아들은 하늘나라에서 완성될 우리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 라헬이 죽고 새 생명이 태어나는 이 장면은, 우리 안에서 옛 자아가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과정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누에고치와 나비의 관계와 같습니다. 누에는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고, 그 고치 안에서 서서히 형체가 변화되어 마침내 찬란한 나비가 되어 밖으로 나옵니다. 그 과정에서 고치는 찢어지고 사라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새 생명이 자라나 완성될 때, 그 생명을 품고 있던 옛 사람이라는 껍질은 서서히 벗겨지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 옛 사람의 껍질이 순순히 벗겨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
철장'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시편 2편은 이 전쟁을 이렇게 그립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2:2~3) 여기서 대적하는 '열방과 관원들'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옛 사람의 잔재를 가리킵니다. 우리 속의 옛 자아는 끊임없이 이렇게 외칩니다. "나도 떡이 좋다. 왜 내가 손해 보고 낮아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잔재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철장을 주어, 우리 안에 남은 옛 사람의 성벽을 사정없이 무너뜨리십니다.

어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사업이 부도가 나서 전 재산을 잃고, 살던 집까지 내놓아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분은 매일 밤 울면서 하나님께 원망 섞인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그런데 몇 년 후 그분은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도 돈이 제 하나님인 줄 알고 살았을 겁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이, 돌아보니 하나님이 저를 진짜 자유케 하신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철장의 은혜입니다. 아프지만, 결국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라헬은 성경에서 '통곡하는 여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31장을 보십시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31:15)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을 두고, 어머니 라헬이 자녀들을 잃고 통곡하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곧바로 위로의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렘31:16~17)

그리고 이 예언은 놀랍게도 마태복음에서 다시 인용됩니다.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두 살 미만 아이들을 모두 학살했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라헬이 묻힌 바로 그 베들레헴에서, 다시 한번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그 통곡을 완전히 끝내실 한 아기가 오셨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어 절망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녀들을 위해, 예수님이 라헬의 무덤이 있는 그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
아무리 산고가 크더라도, 그 해산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흘리는 눈물, 자녀 문제로, 건강 문제로, 관계의 상처로 밤새 흘리는 그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라헬의 눈물이 헛되지 않고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로 응답되었듯이, 우리의 눈물도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반드시 응답됩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요약해 주는 장면이 요한계시록 12장에 있습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계12:2,5) 여기 등장하는 여자는 교회, 곧 어린양의 신부인 우리를 상징합니다. 이 여자가 산고 끝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교회가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완전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여 "저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성도의 완성 지점을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고백에 이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우리 삶의 여러 고비를 통해 그 항복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라헬의 죽음 곁에는 이삭의 죽음도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창35:27~29). 이삭은 손녀가 강간당하고, 손자들이 대살육을 저지르는 험한 꼴을 다 보고 나서야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밤을 탄식하며 지새웠을지 우리는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부서진 사람들 가운데서도 당신의 백성을 끝내 창조해 내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 믿는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고단하고 힘겨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남들은 순탄하게 사는 것 같은데, 우리는 자꾸만 넘어지고, 자기부인의 삶이 버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마치 '지옥'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옥이 아니라, 우리를 진짜 자녀로 완성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입니다. 세상이 좇는 화려한 삶이 실은 공허와 결핍으로 가득한 '지옥'이며, 우리가 걷는 그 낮아짐과 눈물의 길이야말로 '천국'으로 가는 복된 길입니다.

라헬은 슬픔 속에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지었지만,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지금 슬픔이라 부르고 있는 그 이름을, 하나님은 반드시 영광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
주여, 어찌하오리이까" 탄식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