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38장 1~12절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유다는 형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답답했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그 날 이후, 형제들 사이에는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아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형제들은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죄책감에 짓눌렸습니다. 유다는 그 짐을 벗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짐을 챙겨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가 정착한 곳은 아둘람, 가나안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히라라는 가나안 친구를 사귀었고, 곧이어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에르, 오난, 셀라, 언뜻 보면 평범한 정착 이야기입니다. 새 땅에서 새 벗을 사귀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다섯 절 안에는 심상치 않은 균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한 가지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섞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늙은 종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하란까지 보내어 이삭의 아내를 구해온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혈통이 더 고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을 통해 세상에 오실 한 분, '여인의 후손'을 예비하고 계셨고, 그 계보가 세상과 섞여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언약의 계보에 서 있는 유다가 가장 먼저, 가장 태연하게 그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신앙의 뿌리를 가진 어느 청년이 "다 같은 사람인데 뭐가 문제냐"며 대수롭지 않게 신앙의 경계를 하나씩 지워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엔 그저 친구 하나를 사귄 것뿐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그 친구가 소개해준 사람과 가정을 이룬 것뿐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자신이 서 있던 자리가 완전히 다른 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 무거운 것은, 이 모든 과정을 아버지 야곱이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언약의 수혜자인 야곱 자신이 이미 그 정도로 지쳐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만이라도 옆에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유다의 이야기는 유다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야곱과 그 열두 아들 전체, 다시 말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전체가 그때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축소판입니다.
시간이 흘러 맏아들 에르가 다말이라는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에르에 대해 단 한 줄로 잔인할 만큼 명확하게 말합니다. "유다의 장자 에르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창 38:7)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죽었다는 사실,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 그의 생명을 거두셨다는 사실만이 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유다가 가나안에서 낳은 자식들, 즉 순종의 자리를 이탈해서 얻은 열매는 결코 약속의 통로가 될 수 없다는 신호였습니다.
관습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 다말과 결혼해 형의 대를 잇는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낯설게 들리지만, 고대 근동에는 이런 '계대결혼(수혼)'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이름으로 아들을 낳아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풍습을 훗날 율법으로까지 못박습니다(신 25:5~6). 대체 자손을 잇는 일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하나님은 이것을 법으로까지 규정하셨을까요?
답은 창세기 3장 15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의 첫 범죄 직후, 하나님은 뱀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날 이후 모든 구원의 역사는 이 한 문장을 향해 흘러갑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존재하는 이유, 그들이 대를 이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언젠가 그 '여인의 후손'이 이 계보를 통해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태가 닫히는 것, 대가 끊기는 것은 언제나 저주의 상징으로 그려집니다. 사무엘상에서 며느리가 죽어가며 갓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영광이 떠났다"라고 지은 것도,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가 닫혔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 계보를 이어가는 일은 마치 오늘날 대대로 지켜온 등불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 한 사람이 그 등불을 대충 다루면 불씨는 거기서 꺼집니다. 오난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형수에게서 낳을 아들은 법적으로 자기 아들이 아니라 죽은 형의 아들로 등록됩니다. 상속의 몫도 줄어듭니다. 그는 형수와 동침하면서도 임신만은 철저히 피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정면으로 저버린 것입니다. 그 역시 죽었습니다.
두 아들을 연달아 잃은 유다는 셋째 셀라마저 다말에게 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셀라도 형들처럼 죽을까 두렵다"는 것이 그의 속내였습니다(11절). 그는 다말을 불길한 여자로 낙인찍고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겉으로는 셀라가 자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다시 부르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언약의 성취를 가로막아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멈춰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은 이미 유다의 후손 가운데서 '실로', 곧 화평의 왕이 나올 것을 예정해 두셨습니다(창 49:10). 그런데 정작 그 유다 집안은, 아들 셋을 통해 연달아 그 길을 스스로 틀어막고 있습니다. 마치 이어달리기의 마지막 주자에게 배턴을 넘겨야 할 사람들이, 하나같이 배턴을 손에서 놓쳐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이 계보는 이제 완전히 끊긴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의 서술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입니다. 유다 집안의 불가능함이 완전히 드러난 그 자리에, 하나님은 한 여인을 세우십니다. 다말입니다. 세월이 지나 유다의 아내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도 기간이 끝나자 유다는 친구 히라와 함께 양털 깎는 축제에 참여하러 딤나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에게 양털 깎는 시기는 일 년 중 가장 큰 축제였습니다. 목축과 농사로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수확의 계절이자 흥청거리는 잔치의 계절이었고, 동시에 풍요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제사하는 종교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 제사의 형태였습니다.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있었고, 이들과의 성행위 자체가 그들의 예배 의식이었습니다. 신이 인간의 성행위를 보고 흥분하면 그만큼 더 많은 비와 햇빛, 곧 풍요를 내려준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축제 기간이면 여사제들이 신전 문 앞에 나와 앉아 손님을 기다렸습니다.
다말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옷을 벗고 창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유다가 지나갈 길목, 에나임의 신전 문 곁에 앉았습니다. 성경 원문에서 이 '문'은 일반 가정집 문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가나안 종교의 신전 문을 가리키는 전문 단어 '페타흐'입니다. 다말은 정확히 어디에 앉아야 유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갈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라는 사람의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며, 장차 메시아가 그 후손으로 나올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금하신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고, 가나안 친구와 어울렸으며, 형제의 대를 이어야 할 의무도 소홀히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내를 잃은 지 한 달 만에, 슬픔의 흔적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방 신전의 창녀를 찾아갑니다. 그가 며느리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단지 사제 복장의 면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축제 기간 내내 술에 취해 있었던 다른 남자들처럼, 그 역시 정신이 흐려질 만큼 취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로 치면 이런 그림에 가깝습니다. 신실한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나, 교회 안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어떤 사람이, 아내를 잃은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점잖고 신실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과 타협해온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타락은 그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아둘람으로 내려가 가나안 친구를 사귀던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조금씩 그 길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추악한 장면 한가운데 다말을 세워둡니다. 그녀는 창녀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왜입니까? 시아버지의 죄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셀라가 자라도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다면 죽은 남편의 이름을 이을 유일한 길은 이것뿐이라 판단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이 드러났을 때 유다 자신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다." 다말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약속의 계보를 이어가려 한, 언약을 향한 신실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다는 그 언약을 스스로 걷어차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값을 치르지 못한 채 다말과 헤어졌습니다. 나중에 화대로 염소 새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며, 그때까지 담보로 자신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맡겼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의 신분증이자 서명이었습니다. 지팡이는 그의 신분을 나타냈고, 도장은 그의 결재였으며, 끈은 그 도장을 목에 걸던 줄이었습니다. 누군가 이 세 가지를 손에 쥐고 있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 자체를 붙잡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석 달 뒤, 유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녀를 끌어내어 불살라 죽여라." 자신이 신전 창녀와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까맣게 잊은 채, 며느리의 부정에 대해서만 불같이 화를 냅니다. 이것이야말로 죄인의 가장 정직한 초상입니다. 자신의 허물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남의 허물에는 유난히 예민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런 모습을 낯설지 않게 봅니다. 자신의 실수는 상황 탓, 환경 탓으로 돌리면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다른 사람에게는 가차 없이 돌을 던지는 사람들, 유다는 바로 그 전형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다말이 조용히 사람을 보냅니다. "이 물건의 주인이 나를 임신시킨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내밉니다. 유다는 그것을 보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자신의 물건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큽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이런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신실하고 의로운 척 살아가다가도, 하나님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우리 앞에 우리 자신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내미십니다. 감춰두었던 이기심, 애써 외면했던 위선, 남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했던 이중 잣대, 이런 것들이 문득 드러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입니다. 변명하거나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설 수 없습니다."
유다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창 38:26) '옳도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짜다크', 곧 '의'라는 단어입니다. 유다는 다말을 '의롭다' 인정하고, 스스로를 '악하다' 인정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완전히 드러난 그 순간, 비로소 참된 자기 인정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야기는 다말의 출산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쌍둥이였습니다. 해산 중 한 아이의 손이 먼저 나왔습니다. 산파는 그 손에 붉은 실을 매어 첫째임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이 도로 들어가고, 다른 아이가 먼저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산파는 놀라 외쳤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은 '베레스', 곧 '터치고 나온 자'가 되었습니다. 원래 형이었던 아이는 세라라는 이름을 얻으며 뒤늦게 태어났습니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오래전 야곱도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나며 자기 이름의 뜻 그대로 '발꿈치를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원래 순리를 뒤집고 차자가 앞서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세워둔 질서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복된 신호입니다. 세상은 장자권, 곧 먼저 난 자의 몫과 힘을 가장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질서를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랑할 만한 그 어떤 조건, 순서, 자격, 업적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부끄러운 사건에서 태어난 베레스는 훗날 다윗 왕의 조상이 되고,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립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마 1:3) 메시아의 족보에는 흠 없는 명문가의 이름이 아니라, 신전 문 앞에서 몸을 판 여인과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죄를 지은 시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은혜의 증거가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옮겨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짜 창녀는 다말이 아니라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그 진짜 창녀를 구원하기 위해, 오히려 다말이 스스로 창녀가 되어 유다의 죄를 드러내고, 자신이 수치를 뒤집어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진짜 죄인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마치 창녀와 같은 취급을 받는 자리로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우리 대신 수치를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채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죄가 처리되었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써, 여전히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도 이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요셉과 야곱 온 가족의 애굽행이라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유다 집안이 가나안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들은 또다시 히라 같은 가나안 친구와 우상 숭배의 유혹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로 이끄셨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낯선 땅에서의 종살이가 오히려 그들의 신앙과 혈통을 지켜내는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편안함 속에서 늘 엉뚱한 길로 새는 것이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불편한 자리, 낮아지는 자리로 이끄셔서 지켜내십니다.
우리 역시 유다처럼, 스스로는 결코 언약을 이어갈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말 같은 은혜를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문득문득 자신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이 폭로되는 순간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마다 우리를 낮은 자리, 종의 자리, 발을 씻는 자리로 이끄시며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역시, 다른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수모와 손해를 감수하는 삶인 다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 이유 모를 부끄러움과 손해가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라면, 당신은 지금 가장 복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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