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시절, 한 청년이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범한 타작마당이 아니라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적에게 곡식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드온입니다. 자신을 "이스라엘 중에 극히 약한 자"요,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포도주 틀에 숨어 떨고 있는 사람에게 "큰 용사"라니요. 기드온의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큰 용사"라 부르신 그 순간부터, 기드온은 정말로 큰 용사가 되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삼백 명의 군사로 미디안 대군을 물리친 사사,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로 그는 성경에 이름을 남깁니다.
심리학에는 '라벨 효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어떤 정체성을 부여하면, 그 사람은 그 정체성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너는 정리정돈을 잘하는 학생이야"라는 이름표를 붙여주었더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던 아이들이 오히려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단순히 "착하다"는 칭찬을 들은 아이들보다, "너는 남을 돕는 사람이구나"라는 정체성의 언어를 들은 아이들이 훨씬 더 오래, 더 자주 선한 행동을 이어갔다는 실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에 반응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지도자가 부하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어떤 존재로 불러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세상의 심리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발견한 원리이지만, 사실 성경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 진리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말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녀 없는 노인에게, 하나님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때 그에게는 자녀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니라 그가 될 존재를 부르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바뀝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변덕스럽고 성급한 어부는 예수님을 만난 후 '베드로', 곧 '반석'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시몬은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현재가 아니라 성령으로 그가 될 모습을 미리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라벨링입니다. 세상의 라벨 효과가 인간의 잠재력을 자극하는 심리 기술이라면, 하나님의 이름 부르심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누군가를 어떤 존재로 부르실 때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떤 이름을 받았을까요? 성경은 우리를 향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우리는 세상의 빛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라벨을 진심으로 믿고 살아가느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자신을 실패자, 부족한 자, 죄에 매인 자라는 옛 이름표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삶은 그 이름에 걸맞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녀에게 "왜 이렇게 정리를 못 하니"라고 말하는 대신 "너는 정리를 참 잘할 수 있는 아이야"라고 말해줄 때, 배우자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무심해"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은 참 다정한 사람이야"라고 말해줄 때,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될 수 있는 모습을 미리 불러주는 것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사도들은 그를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그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의심하던 사울을 받아들여 준 사람, 마가가 실패한 후에도 그를 다시 세워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어쩌면 그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그를 '위로의 아들'이라 불러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에게 이름표를 붙이며 살아갑니다. 그 이름표가 정죄와 실망의 언어일 수도 있고, 은혜와 소망의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도주 틀에 숨은 겁쟁이를 큰 용사라 부르셨듯, 우리도 서로를 향해 하나님이 보시는 그 존재로 불러줄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 곁에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이 이미 붙여주신 그 이름을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을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 함과 같으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로마서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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