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5:1~5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15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던진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곧, 누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으며, 누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다윗은 그 답을 ‘삶의 모습’에서 찾습니다. 정직하고 공의를 행하며, 혀로 남을 해치지 않고, 이웃을 존중하며, 서원한 것을 지키는 사람, 뇌물을 멀리하고 돈으로 이익을 탐하지 않는 사람, 이런 이가 하나님 앞에 설 자라고 말합니다. 즉, 예배는 단순히 제사와 예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 진리를 모르고 산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찬송과 기도보다, 가정과 직장에서 살아가는 태도와 말이 더 깊은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사는 것’ 사이의 거대한 간격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일상의 삶이 온전히 예배가 될 수 있을까요?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제자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며, 주님의 방법은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의 말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길은 성령 충만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템플의 비유는 이 사실을 더 선명히 보여 줍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나에게 주고, 그와 같이 쓰라고 말한다면 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셰익스피어의 영감과 재능이 내 안에 들어온다면 가능해진다. 예수님의 삶을 보여 주고, 그대로 살아내라고 말한다면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 곧 성령이 내 속에 들어오신다면 나도 그분처럼 살 수 있다.”
이 말은 우리 모두의 현실을 정확히 짚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 정직과 공의, 사랑과 신실함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결심해도 금세 무너지고 흔들립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다스리실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뀝니다. 정직은 나의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되고, 공의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힘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령 충만한 ‘일상의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는 1시간보다, 집에서 가족을 대하는 모습, 직장에서 동료를 대하는 태도, 돈과 이익을 대하는 자세가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제사가 됩니다.
다윗이 말한 마지막 약속은 그래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성령 안에서 정직과 진실을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하나님 자신 안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내 장막에 거할 것이냐? 누가 내 성산에 오를 것이냐?” 우리의 대답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 제 안에 성령으로 충만히 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제 삶이 주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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