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언젠가, 이 땅의 모든 한계를 넘어 진리로 소통하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서로를 온전히 아는 그 날.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이 땅의 삶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체감하는 시간들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절망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니 지금을 가볍게 살지 말라”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복음을 올바로 이해했다고 하면서, 현실을 불성실하게 여기고, 책임을 회피하고, 심지어 방종으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가치 없는 곳’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이며, 하나님 나라를 연습하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부자가 죄가 아니라 “부자 정신이” 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또는 “좋은 차를 타면” 신앙적으로 거리낌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재산을 가진 부자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인 ‘푸토코스’는 단순히 물질이 없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도 사실은 없습니다. 성경적 의미의 가난은 절대적 결핍, 즉 “나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진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자를 성경은 가난한 자라 말합니다. 반대로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나는 노력하면 된다”, “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훌륭하니 괜찮다”, “나는 내 의로, 내 열심으로 설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재산이 많아도 ‘가난한 자’가 있을 수 있고, 재산이 없어도 ‘부자’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말했습니다. “선생님,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 부자는 항상 이렇게 접근합니다. “무엇을 하면?” “어떤 행위를 더해야?” “내가 더 노력하면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시겠지?” 하지만 구원은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이 말하듯이,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말합니다.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 말은 단순한 재산 기부 명령이 아닙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나의 행위, 나의 성취, 나의 업적”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가 줄 ‘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로 가득 찬 사람은 진리를 전할 빈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요구를 듣고 뒤로 물러갑니다. “내가 지켜온 업적을 어떻게 남에게 나눠줘?” 그렇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부자’라 부릅니다.
진짜 은혜를 아는 자는 “내 것을 주고 싶은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닮기 원한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순교적 결단’이 아니라 “나의 자아, 나의 의, 나의 공로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어떤 이는 찬양의 순간에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아… 잠깐만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취소!” 정직한 고백입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함”은 믿음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라.”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살아내라.” 장난처럼 태만하게 살면서, “세상 가치에 얽매이기 싫어서요." “부담스러워서 스펙을 안 쌓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성도는 게으름과 불성실을 복음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자리인 학생이면 공부, 직장인이면 직업, 부모이면 양육을 의무로, 신앙의 책임으로 주셨습니다. 성도는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웁니다.
이 모든 시간은 우리를 영원으로 이끄는 준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성공도 경험하고, 때로는 실패도 경험하고, 때로는 만족하고, 때로는 허무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합니다. “아… 이 땅의 모든 만족은 영원하지 않구나.” “진짜 영원한 것은 하나님뿐이구나.” 우리는 이 깨달음을 통해 점점 가난한 자(푸토코스)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마침내 “진리로 영원히 소통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글자가 아니라 안에 담긴 진리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진리는 성령이 오셔야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그 진리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가난함으로 사는 것, 내 의와 공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 선으로 우리는 우리 안의 악을 이기고, 세상의 악을 이기고, 결국 우리를 영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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