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종종 성경의 말씀중 익숙하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 는 말을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착하게 살아야지’, ‘나쁜 생각을 줄여야지’, ‘선행을 많이 해야겠지’ 정도로 가볍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정도라면, 사실 불교·유교·이슬람과 다를 게 없습니다. 모든 종교가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독교는 뭐가 다른 걸까요?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 걸까요?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란 무엇인가?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은 과연 누구인가? 성경은 우리를 단순한 도덕이나 윤리의 자리로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창세기 1장 1절로 되돌립니다.
모든 시작점은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단지 세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우리를 어디에 세워 놓고 살아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성경의 첫 문장에는 이런 선언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 기준, 목적, 의미를 창조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기준을 따라 착하게 살려는 노력, 깨달음, 수행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선행이나 수행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곧장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기준이다." “하나님이 시작이다.” 즉, 기독교는 인간의 ‘착함’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적 선(善)에서 시작합니다.
기독교는 “착하게 사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마저 “착하게 잘 살아서 복 받자”는 메시지로 흐르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그건 불교의 삼천배와도, 이슬람 사원의 기도와도, 유교적 도덕철학과도 대단히 유사합니다. 입시철이면 절에서도 기도하고, 이슬람 사원에서도 기도하고, 교회에서도 기도합니다. 내용은 대부분 같습니다. “우리 아이 대학 잘 가게 해주세요.” “우리 가정 잘 되게 해주세요.”
종교는 달라도 목적은 비슷합니다. 착하게 살아서 좀 잘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합니다. “이런 목적이라면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단지 ‘바르게 살기’를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을 다잡는 의지가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난 믿어야 해. 의심하면 안 돼.” “믿음 없는 사람으로 보이면 안 되는데…” 자꾸 스스로를 다그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어보려고 하고, 의심이 들면 자기 자신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내 감정과 의지가 만들어내는 결단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자리,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 위에 서는 자리입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들레즈는 인간 사회를 ‘노마디즘’(떠돌아다님)으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자리 잡으면 또 그 자리에서 소외가 생기고, 그걸 뒤집어 보지만 결국 다시 고착됩니다. 혁명, 개혁, 탈주의 반복 속에서도 인간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전혀 다른 노마디즘입니다. 아브라함을 우르에서 끌어내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셨듯,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질서에서 끌어내어, 하나님이 주시는 땅으로 이동시키십니다. 이 이동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이 계십니다.
애굽은 물만 부으면 농사가 되는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열 바가지를 붓는 사람은 열 가마니를 수확합니다. 그러니 밤에도 누가 더 물을 부었는지 경쟁이 붙고, 쉬지 못하고, 잠을 못 잡니다. 성경은 이것을 노예 생활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노력·경쟁·욕망에 끝없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세상도 같습니다. 더 벌어야 하고, 더 쌓아야 하고, 더 보여줘야 하고, 잠시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미스라임), 인간이 스스로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을 지키려 애쓰는 삶입니다.
가나안은 천수답 농사입니다. 물 댈 곳이 없습니다. 밤새 물을 부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이 비를 내리시면 열매가 있고,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애써도 열매가 없습니다. 이것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경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으로 유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약속의 땅, 은혜의 자리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착하게 살아서 나쁜 것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은혜, 그분이 주시는 생명에 자리를 옮김으로써 세상의 악한 질서(애굽)를 이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착함으로 악을 이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우리를 끌어내고, 끌고 가고, 새롭게 하여 악의 체계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선으로 악을 이겨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익숙한 신앙을 벗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새로 서야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묻습니다. “너는 지금 어떤 기준 위에 서 있는가? 네가 만든 선인가, 하나님이 창조한 선인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애굽에서 끄집어내고 계십니다. 경쟁, 비교, 욕망이라는 노예 삶에서 끌어내 은혜만 바라보는 가나안으로 데려가십니다. 그 땅에서 비로소 우리는 악을 이기는 선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선, 하나님이 주시는 질서, 하나님이 만들어내는 생명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깁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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