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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삶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1.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에베소서 1:2)

이 세상 어느 누구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
참으로 만족스러웠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푸쉬킨의 시처럼, 인생이 우리를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내가 원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 억울한 상처들… 우리는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힘 있는 존재를 향해 섭섭함을 토로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왜 나는 이런 집, 이런 부모, 이런 시대에 태어났을까?”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복잡하고 불공평할까?”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불평이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숨어 있습니다.

삶이 나를 속인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인생은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 앞에서 “
삶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떠나고, 원하던 일은 언제나 나와 엇갈렸습니다. 마치 “
머피의 법칙”이 내 인생을 조종하는 듯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군가’, 즉 하나님께서 일부러 나를 괴롭히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마에 첫 주름이 생기던 무렵,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만남은 마치 오랜 어둠 끝에 새벽이 찾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삶은 한 번도 나를 속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원한 것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그 모든 시간은 내게 유익이었습니다. 고통은 나를 다듬었고, 기쁨은 나를 감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삶이 아니라, 나의 불신이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언제나 나를 위해, 가장 선한 길로 이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나는 조금씩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 원리는 힘의 원리입니다. 더 많이 가진 자, 더 높은 자, 더 세게 말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자신을 돕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
’를 비우고, 내 뜻을 내려놓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듯이, 그분의 제자들도 ‘자기부인’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순조로울 리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길과 언제나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세상의 법 아래에 있지만, 정작 세상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시며, 그의 자녀를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 삶 속에 깊이 개입하십니다.

때로는 회초리를 드시기도 하고, 때로는 다정히 품에 안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분의 손길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사라졌을 존재들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죄입니다. 삶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늘도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혹시 지금 깊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없고, 세상은 냉혹하며, 내가 믿는 하나님조차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정죄하려는 분이 아니라, 당신을 하늘의 자녀로 성숙시키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죄, 심지어 부끄러운 실수까지도 그분의 손 안에서는 ‘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스스로의 추함을 보게 하시고, 그 추함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이라는 인생의 길을 걸으며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영원한 하늘의 집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는 그 하늘의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도들이 성도다워지는 훈련의 무대인 이 세상을, 마치 영원한 목적지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예배당은 병을 고치고,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
무당집’처럼 변해버렸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중재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
고난’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설교는 그 고난을 은폐하고, ‘만사형통’, ‘기적’, ‘신비한 체험’으로 포장해 버립니다.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는 ‘’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샤머니즘적 위안에 불과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려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위해 우리의 실패를, 질병을, 상실을 사용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이 땅의 헛된 영화에 정나미가 떨어지게 하시고,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
자기부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자신의 손해로 남의 유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던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새사람이 살아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복을 경험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여전히 고난이 따르겠지만,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빚고 계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십자가의 삶, 그 길을 기꺼이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삶은 언제나, 정확하게,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고난 앞에서 불평하지 맙시다. 그 속에도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오늘도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
주여,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 한마디 고백이 이 땅의 모든 인생을 하늘의 평강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