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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인간과 죄(1)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1. 17.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결코 듣기 편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바울은 마치 숨을 멈춘 영혼 앞에서 의사의 진단서를 펼쳐 보이듯, 죄로 죽은 인간의 상태를 차갑고도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그 죽음의 실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즉, 인간은 단순히 “잘못된 영향을 받아서 잠시 비틀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
너희가”라고 말해 에베소 교회를 꾸짖는 듯 보이지만, 곧바로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지냈다”(엡 2:3)라고 고백하며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동일하게 죄 아래 있음을 밝힙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

죄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능동적 반역입니다. 우리는 죄를 가끔 실수라고 여기고, 혹은 마음의 연약함 정도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의도적이고 능동적인 반역입니다. 단순히 “
착한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적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중립적인 상태”에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인간은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죄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던 존재는 오직 ‘타락 이전의 아담’뿐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로 기울어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죄인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죄인은 “악을 의도적으로 행할 능력은 있지만, 선을 의도적으로 행할 능력은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이다. 환경만 좋으면 사람은 선해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정확히 반대로 말합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입니다. 아무리 밝은 빛이 비춰도 눈이 먼 사람은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문제는 “주변의 어둠”이 아니라 자기 안의 어둠입니다.

죄는 배워서가 아니라 타고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출생합니다.” 시편 51편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과 모세 사이에 율법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이 계속 죽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원죄를 설명합니다. 법이 없으니 ‘
’라고 부를 근거도 없었는데 왜 사람들은 계속 죽었을까요? 사망은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 즉, 겉으로 죄를 짓지 않은 아기조차도 사망 아래 있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오늘날 세상은 말합니다. “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은 환경 탓이다. 때리지 말고 충분히 이해시키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련한 것이 아이의 마음에 붙었으나, 매로 그것을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성경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훈계와 징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핵심 사상가였던 프로이드는 결국 우울과 마약, 깊은 불행 속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반면 C. S. 루이스는 하나님을 만난 후 진정한 자유와 행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입니다. 에덴동산보다 완벽한 환경이 있었습니까? 그곳에서도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불순종의 본질은 내가 왕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나 충동이 아닙니다. 죄의 핵심은 하나님 대신 내가 왕이 되겠다는 마음입니다. 아담의 죄도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절제하는 삶 안에서 더 깊은 기쁨을 누립니다. 당신도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모르고 방종하며 살 때보다, 지금 하나님 안에서 절제하며 사는 삶이 훨씬 행복하지 않습니까?

원죄를 부정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선배의 아버지가 처음 예배당에 와서 ‘
원죄’ 설교를 듣다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거 개똥 같은 소리 그만하시오!” 그는 다시는 예배당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원죄는 인정하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을 깊이 볼수록, 내 자신을 정직하게 볼수록 원죄는 피할 수 없는 진리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였습니다. 그가 타락했을 때 그의 후손인 우리는 모두 죄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실 때, 그분 안에 있는 우리는 모두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죄인이 속죄의 은혜를 말할 때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 나는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몸을 입고 영원한 나라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 어느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화를 나눕니다. 아이언사이드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설교할 때, 한 유명한 무신론자가 공개 토론을 요청했습니다. 아이언사이드 목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물론 토론하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의 무신론으로 삶이 변화되고, 죄에서 벗어나 소망을 얻은 사람 한 명을 데려오십시오. 나는 복음으로 변한 수백 명의 증인을 데려오겠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문제를 바꿀 수 없습니다. 환경도, 교육도, 철학도, 심리학도 인간을 새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죽은 자를 살립니다. 우리를 “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은혜로 살아난 자”로 옮기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살리십니다. 인간은 죄로 눈이 멀어 빛을 볼 수 없고,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며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아름다운 선언은 이것입니다. “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에게 소망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은혜의 자녀”로 옮기셨습니다. 이 은혜 앞에서 우리는 오늘도 감사하며 고백합니다. “주님, 저를 살리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