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7~9)
성경에는 수많은 기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구한 기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한 기도, 야베스의 간절한 기도,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기도,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한나의 기도, 죽음의 병상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붙든 히스기야의 기도,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과 비를 구한 기도, 절망 속에서 찬송과 간구를 올린 여호사밧의 기도,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드린 겟세마네의 기도가 있습니다.
정말 다양한 기도가 성경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지혜의 책’으로 알려진 잠언에는 오직 한 편의 기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아굴의 기도입니다.
아굴은 하나님께 평생 두 가지를 구합니다. 첫째,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소서.” 둘째,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만 먹이소서.”
이 두 번째 기도는 흥미롭게도 이유가 덧붙어 있습니다. 왜 그는 여기에서만 설명을 붙였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핏 들으면, ‘아굴은 적당함의 미덕을 아는 사람’, ‘중용의 가치를 아는 현자’, ‘자족의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굴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의 기도의 이유는 ‘적당함’이 아닙니다. 중용이 좋아서도 아니고, 자족의 철학을 따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아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렵고,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는 부함이 가져올 영적 위험을 알았습니다. 배부름은 마음을 교만하게 하고, 하나님을 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난이 주는 유혹도 알았습니다. 궁핍은 믿음을 지키기 어렵게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리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리에도 서지 않게 하소서.”
솔로몬은 이 기도를 잠언에 기록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기도다.’ 저 역시 아굴의 기도에 깊이 공감합니다. 진정 지혜로운 기도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이든, 어떤 상황이든, 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아굴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성공과 부함을 열렬히 구하면서, 아굴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하나님을 잊는 위험’에는 무감각한 것은 아닐까요? 기도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 소원’으로 향해 있다면, 그 기도는 아무리 길고 간절해도 지혜롭지 못한 기도입니다. 아굴의 기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의 기도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가?”
오늘 우리는 아굴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아야 합니다. 아굴의 기도처럼, 우리의 삶의 무게추가 하나님께 향해 있다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가장 지혜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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