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라디아서 3:1)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십자가가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교회 안에 있으니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성경도 읽으니 자신은 분명 믿음 안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매우 충격적인 말을 던집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 말은 곧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는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십자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조금 더 노력하면 괜찮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단 하나를 증거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는 존재이며, 그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한 방향을 향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에 마음을 둡니다. 마치 큰 빚을 진 사람이 보증인이 대신 모든 빚을 갚아 주었을 때, 더 이상 자신의 형편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해결된 문제를 붙잡고 “내가 잘 살고 있는가, 못 살고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이미 끝난 사건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선언 아래, 인간이 더 보탤 것도, 증명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듭니다. 요즘 나는 믿음이 좋은가? 예전보다 성질이 좀 누그러졌는가? 남들보다 덜 화내는가? 성도답게 살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겉으로 보기엔 경건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들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태도를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미성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이라까지 말합니다(빌 3:18).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증거는 반드시 눈에 보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행동’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변화된 삶, 나아진 성품, 선한 실천을 통해 믿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이미 눈앞에 가장 분명한 증거가 있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의 구절을 우리는 종종 오해합니다. 마치 갈라디아 사람들이 실제 십자가 처형 장면을 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눈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상 속 장면이 아닙니다. 역사책 속 한 장면도 아닙니다. 지금도 현실 속에서 계속 드러나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자체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고, 서로 비교하며,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조차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삽니다. 이 끝없는 자기 증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인간의 욕망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현실은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지를 날마다 반복해서 보여 주는 현장인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둘 다 예수님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같이 못 박혔고, 같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말은 믿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건부 요구입니다. “내 이 비참한 상황을 해결해 주면 당신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겠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면 믿겠습니다. 삶이 나아지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인정하겠습니다. 이것은 육체를 위한 그리스도를 요구하는 태도입니다.
반면 다른 한 강도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마땅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구원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기억해 달라고 말합니다. 자격 없음 속에서, 죄 없는 분께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잘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곧 제자들이 이루어야 할 의가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성도는 자기 삶을 ‘성도답게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로 살지 않습니다. 대신,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살아갑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를 위한 삶이 더 이상 성도의 삶의 기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은 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분을 내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 이 말씀을 율법으로 읽으면, 신앙은 끝없는 자기 관리가 됩니다. 분노가 올라오면 실패한 신앙인이고, 말 한마디 실수하면 자책하며 다시 다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이것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너희는 이런 존재가 아니다”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분노는 의지로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상황이 떠오르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가 끊임없이 분노와 욕망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현실 속에서 성도를 붙들어 주는 것은 성화의 성공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보게 되는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어제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는 실패하고, 오늘도 분노하고, 오늘도 육신을 위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못 박히심이 새롭게 보입니다. “아, 그래서 오늘도 십자가가 필요한 존재구나.” 이 고백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는 성도는 “왜 너는 행함이 없느냐”는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질문이 십자가를 보지 못한 질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당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영광인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한탄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더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십자가 대신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눈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만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이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
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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