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2:4~5)
어느 회사에 새로 입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약서에 분명히 “정규직”으로 명시되어 있었고, 급여와 휴가, 복지까지 모두 보장된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주변에서 은근한 말들이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수습 기간 같은 거지.” “이 정도 성과는 내야 진짜 인정받는 거야.” “말은 정규직이라도 더 노력해야 살아남지.” 처음에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더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이미 보장된 신분인데, 마치 임시직처럼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계약서는 그대로인데, 그의 마음은 다시 종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이 겹쳐집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를 엿보는 자들”은 노골적으로 사슬을 들이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합리적인 말로 다가옵니다. “믿음도 중요하지만, 이것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로 구원받는 건 맞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 정도는…” 이 말들은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임감 있고 성실한 신앙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더 큽니다. 바울이 말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소리치며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고,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며,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는 얼굴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유를 것을 살짝 건드립니다. 바울은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할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유를 훼손하는 순간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옵션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자유를 조금이라도 조건부로 만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자유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자유는 이미 다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사는 자유입니다. 더 증명할 것도 없고, 더 보탤 것도 없으며, 더 인정받아야 할 조건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유를 불편해합니다. 왜일까요? 자유에는 내가 개입할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나의 열심을 필요로 하지 않고, 나의 성취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시 종의 자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뭔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십자가 옆에 작은 조건 하나를 슬쩍 올려놓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4장에는 노비를 자유롭게 하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나옵니다. 백성들은 순종했고, 노비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노비를 끌어다가 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단순한 약속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도 같았습니다. 자유를 받았지만, 그 자유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붙잡고 관리할 수 있는 것, 눈에 보이는 기준, 측정 가능한 행위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 틈을 타 거짓 형제들이 “자유도 좋지만, 이것이 더 확실하지 않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부담스러운 자리에서도, 사도들이 있는 곳에서도, 그는 복음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달리고 있는 것도, 달려온 것도,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복음이 달리게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시작했고, 복음이 이끌었으며, 복음이 끝낼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유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기뻐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편해하고 있는가? “다 이루었다”는 말 앞에서 안도하는가, 아니면 다시 조건을 찾고 있는가? 자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유는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성도는, 자유를 엿보며 다시 종으로 만들려는 어떤 말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 말이 아무리 경건해 보이고, 아무리 책임 있어 보여도 말입니다. 복음은 더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미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충분함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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