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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이야기

거듭남과 축사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에베소서 2:1~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축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귀신 들림과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고 자유의지 안에서의 복음의 권세에 대해 우리는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
귀신을 쫓아낸다”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복음의 빛 안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축사는 단순한 겉모습 이상의 본질적 전환을 다룬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하나님 없는 인간은 실제로 영이 죽어 있는 존재이며, 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
진노의 자녀’였고, 세상 풍조와 마귀의 다스림 아래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사람을 사로잡는 일은 그저 드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인류 전체의 기본적인 영적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습니다. 이 생명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
소속의 전환’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구원은 단지 죄 용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
나라의 이전’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통치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 전환의 순간이야말로 축사의 본질이 가장 깊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복음 선포와 함께 귀신들이 떠나가는 사건을 함께 기록합니다(사도행전 8:6~7).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복음의 권세가 세상의 권세를 깨뜨리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이 남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매우 조심스럽고 정밀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귀신들림(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은 인격 전체가 귀신에게 장악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영혼의 중심까지 사로잡힌 상태이며, 자아의 통제가 거의 무너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어떠한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은 인간을 ‘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며,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거듭남이 ‘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합니다. 즉, 거듭난 성도의 영은 성령과 연합된 지성소요, 그곳은 더 이상 귀신이 침범할 수 없는 성역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혼과 몸도 함께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지, 그리고 육체는 여전히 연약하며, 이 영역은 귀신들의 억압이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
들림’은 아니나, 억압과 영향 아래 놓일 수 있다는 설명의 근거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가 귀신에게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마귀에게 완전히 지배당하는 '들림' 상태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축사의 본질은 귀신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의 말씀은 매우 깊은 통찰을 줍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으나 빈 채로 있으면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

이 말씀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경고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를 누가 대신 차지하느냐입니다. 귀신이 떠난 자리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좌정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올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축사는 죄의 회개와 삶의 주권을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복음적 사건입니다. 귀신이 떠나가는 현상은 그 열매일 뿐이고, 중심은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라 하더라도, 반복적인 죄, 용납된 불순종, 과거의 미움과 상처가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면 귀신들은 그 틈을 파고듭니다. 죄는 언제나 사탄의 거처가 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명합니다. 틈은 사탄의 발판이며, 이 틈이 곧 억압의 문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귀신의 역사는 단순한 문제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원자로는 믿지만, 주인으로는 온전히 모시지 않은 삶”에서 비롯됩니다. 신앙의 중심이 여전히 ‘자기’일 때, 마귀는 자신 있게 틈을 엿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삶 전체를 내어드릴 때, 귀신들은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더 이상 그들의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로 주를 모신 삶이 진정한 해방이 됩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강제로 우리를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순종하며, 주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삶 속에 진정한 축사, 곧 해방이 일어납니다.

축사는 단지 귀신을 내쫓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 자리, 그것이 진짜 축사인 것입니다. 죄가 다스리던 마음에 주님이 다스리시는 통치가 시작되는 순간, 귀신은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임할 때, 어둠은 자리를 잃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축사의 본질을 외적인 현상보다 더 깊은 복음의 실체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단지 귀신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실현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자요, 해방받은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자는 더 이상 어둠의 억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