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린도전서14:4~5)
고린도전서 14장 4~5절은 성령의 은사 중 ‘방언’과 ‘예언’, 그리고 ‘통역’의 역할과 가치를 비교하면서, 그 궁극적인 목적이 ‘교회의 덕을 세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이는 곧 성령께서 우리 안에 행하시는 모든 사역의 목적이 개인의 경건을 넘어서 공동체의 유익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통역의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 복음의 도구이며, 또 얼마나 실제적인 은혜의 통로인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깊은 교제의 언어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은 방언이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언어는 우리의 지성과 언어를 넘어, 성령께서 우리의 깊은 심령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비밀한 대화입니다.
이 방언은 다른 어떤 은사보다도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은사’입니다.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에서, ‘덕을 세운다’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오’는 본래 ‘집을 건축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방언은 곧 내 영혼의 집을 지어 올리는 은사이며, 내 내면의 연약함과 무너진 기도의 집을 다시 세워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 방언이 공동체 속에서도 유익하게 사용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통역의 은사’입니다.
방언이 개인의 영적 강화라면, 통역은 공동체를 향한 복음적 도약입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이 예언처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이 말씀은 단순히 예언이 방언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이라는 관점에서 은사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통역은 방언을 통해 성령께서 전하신 메시지를 다른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 은사입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 해석이 아니라, 영적인 메시지를 이해 가능한 언어로 풀어내는 영의 통역이며, 성령의 감동 가운데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고, 교회를 세우는 능력의 통로가 됩니다. 방언이 주관적이라면, 통역은 객관적입니다. 방언이 비밀이라면, 통역은 그 비밀을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전 14:13)고 권면합니다. 이는 통역의 은사가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의 말씀처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통역의 은사를 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은 이렇게 확언합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막연한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담대한 확신으로 통역의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통역은 단순히 기계적인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듣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훈련이자, 순종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한 뒤 잠시 멈추고, 내 안에 떠오르는 단어, 이미지, 문장을 민감하게 붙잡는 것이 통역의 시작입니다. 그 느낌이 모호하고 추상적일 수 있지만, 반복하다 보면 그것이 분명한 통역으로 확장되고 명료해집니다.
처음엔 방언과 통역 사이에 시간차가 있지만, 익숙해지면 동시에 이루어지는 ‘동시 통역’의 수준에 이르기도 합니다.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은, 방언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뜻을 말로 풀어내는 성령의 흐름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언과 통역의 삶은 결국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로 드리는 기도 이상으로, 주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 되어 나오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성령이 내 영을 통해 기도하시고, 내가 통역함으로 그것을 깨닫게 되며, 마침내는 내가 직접 방언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이런 기도의 자리는 결코 내 자아를 고집해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자기 부인의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은사들 속에서 진짜 능력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단 하나, 모든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자기 자신을 세우고, 통역이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구해야 하고, 그것을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실천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믿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통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향한 복음의 통로가 되십시오. 방언은 영의 대화이며, 통역은 복음의 선포입니다. 오늘,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에서 공동체를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여정을 시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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