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린도전서 13:12)
몇 해 전, 한 청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낯선 나라의 공항 시스템, 환전, 대중교통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다른 친구가 유튜브 영상 몇 개를 근거로 더 자신 있게 반박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 가보니까 실제로는 다르던데"라는 말에, "인터넷에 다 나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경험한 사람은 조심스러워지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확신에 찹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던 시대나 지금이나 이 풍경은 똑같습니다. 신령한 것을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방언으로 기도해 본 적도, 치유의 능력을 구해본 적도, 깊은 기도의 몰입 속에서 눈물 흘려본 적도 없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런 것은 성경이 완성된 후 다 끝났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태도를 향해 아주 담담하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정죄가 아니라 진단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다양한 은사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13장에서 "가장 좋은 길", 곧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14장에서 다시 방언과 예언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언뜻 보면 이상한 구조입니다. 사랑 이야기를 은사 이야기 한가운데 끼워 넣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한 장인이 제자에게 "연장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이 일이 왜 존재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장 없이 목적만 이야기하면 공허하고, 목적 없이 연장만 다루면 위험합니다.
바울은 은사(연장)를 보여주고, 그 은사가 향해야 할 목적지(사랑)를 보여준 뒤, 다시 그 목적지를 향해 연장을 실제로 사용하는 법(예언과 방언)으로 돌아옵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이고, 은사가 없는 사랑은 방향만 있고 몸이 없는 관념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가페"를 "무조건적인 사랑" 정도의 추상적 개념으로 배웁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초대교회에서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 보면 다른 풍경이 열립니다. 유다서 12절은 이 단어를 성도들이 함께 나누는 식사, 곧 '애찬'을 가리키는 말로 씁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함께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구체적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밤, 다락방에서 떡을 떼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막 14:22).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떡을 떼시는 순간 비로소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눅 24:30~31)고 기록됩니다.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함께 먹는 것이 먼저였고, 그 먹음이 그들의 눈을 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래 떨어져 있던 부모와 자녀가 다시 만났을 때, 백 마디 사과의 말보다 함께 밥 한 끼를 먹는 시간이 관계를 회복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로는 다 전달되지 않던 것이,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누는 그 몸의 행위 속에서 전달됩니다. 아가페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동의하는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로 나누어 먹는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은사도, 구제도, 이 생명의 나눔이 빠지면 소리만 나는 악기에 불과합니다.
기적종식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리고 이 "온전한 것"을 신약성경 66권의 완성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스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것은 성경책의 완성이 아니라,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하는 그 날, 곧 재림과 완성의 때를 가리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우리 중 누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 본 것처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옛적 청동거울처럼 흐릿한 상을 봅니다. 마치 안개 낀 창문 너머로 사람의 형체만 겨우 분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부분적으로 아는" 시대, 곧 성령의 은사가 여전히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독 예언을 사모하라고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언은 여러 은사가 함께 어우러져야 나타나는, 신령한 것들의 종합 열매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신령한 경험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습관'입니다.
한의사가 제자를 키울 때, 책으로 약재 이름을 외우게 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직접 손으로 맥을 짚고, 직접 약재 냄새를 맡고, 스승 곁에서 수백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합니다. 그렇게 몸에 밴 것을 우리는 '공부(工夫)'라 부르고, 그런 학습을 '도제(徒弟)'라 부릅니다. 영어로는 disciple, 곧 제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스승이 하는 것을 몸으로 따라 하다가 마침내 그것이 자기 삶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된 사람입니다.
오늘의 많은 신앙 교육이 이 지점에서 한계에 부딪힙니다. 함께 살거나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제자훈련은 자꾸만 지식 전달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제안한 방법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함께 먹는 것, 함께 신령한 것을 경험하는 것이 지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까지 사람을 데려갑니다.
지금 우리는 정보가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원한다면 누구나 몇 초 안에 방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정보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더 쉽게 확신하고 더 쉽게 흔들립니다. 마치 앞서 이야기한, 가보지 않고도 더 크게 목소리를 내는 이들처럼 말입니다.
문명의 변곡점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몸에 밴 믿음, 실제로 주님을 경험한 흔적입니다. 폭풍이 몰아칠 때 배의 구조를 설명한 책을 읽은 사람과, 실제로 폭풍 속에서 배를 몰아본 사람은 다릅니다. 후자는 흔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몸이 압니다. 우리가 신령한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로 맛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이 흔들릴 때 우리를 붙드는 것은 우리가 외운 교리의 양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결론은 단순합니다.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신령한 것을 두려워하지 말되, 무질서를 사랑으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아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미함 속에서도 매일의 식탁에서, 매일의 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로 맛보아 알아가는 것, 그것이 다가올 시대를 흔들림 없이 살아갈 성도의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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