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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기름부음

믿음으로 여는 기도의 언어 - 성령의 강을 건너는 법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6.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린도전서 14:5)

어느 수요일 저녁 예배가 끝난 후, 한 성도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
목사님, 방언이 왜 필요한지는 이제 알겠어요. 정말 사모하는 마음도 생겼고요. 그런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게 너무 답답합니다." 짧은 문자였지만, 그 안에 오랜 갈망과 막막함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도 같은 마음을 품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방언이 유익하다는 것은 들어서 알겠는데, 정작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답답한 분들은 오늘 이 글은 그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먼저 한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방언을 '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로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영적으로 뛰어난 몇몇에게만 이 은사를 허락하신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는 사람을 보면 왠지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신앙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씁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노라"(고전 14:5). ''라는 단어를 눈여겨보십시오. 바울은 일부가 아닌 전부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같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까? "다 방언을 말하겠느냐?"(고전 12:30). 이것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두 본문이 말하는 방언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12장의 방언은 공적인 예배에서 통역과 함께 회중 앞에 선포되는 예언적 기능의 방언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역할입니다. 반면 14장의 방언은 개인적인 기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영적인 대화의 수단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모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선물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것을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한 기도의 언어를 가지고 계십니다. 방언은 어딘가에서 새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분들이 방언을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요? 20세기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오순절 부흥 운동은 방언이라는 은사를 다시 교회에 불러왔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이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가르침이 굳어졌습니다. "
방언은 성령 세례를 받은 증거로 터지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방언을 받으려면 성령 세례를 먼저 받아야 하고, 성령 세례는 특별한 기도와 노력 끝에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므로, 결국 방언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 됩니다.

이 가르침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습니다. 산 기도원에서 며칠을 금식하며 울부짖어도 방언이 터지지 않으면, "
나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라는 자책과 좌절 속에 빠지게 됩니다. 방언이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계급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방언은 산에서 뽑아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미 우리 안에 오셨고, 그분의 언어도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받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기 시작하느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성경의 두 장면이 도움이 됩니다. 첫 번째 장면은 홍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군대에 쫓겨 바다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먼저 행동하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바다가 갈라졌고,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백성들은 그 마른 땅 위를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길을 여신 것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요단강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려 할 때, 요단강은 마침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물이 가장 많이 불어난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홍해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강을 가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라."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첫발을 강물 속에 내디딜 때, 그때 비로소 강이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수 3:13~17). 홍해는 하나님이 먼저 여신 길입니다. 요단강은 우리가 믿음으로 먼저 발을 내딛을 때 열리는 길입니다. 방언은 요단강의 방식으로 열립니다.

어떤 분이 운전을 막 배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면허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운전할 능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운전석에 앉아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
하나님, 저를 운전하게 해주세요. 제 발이 저절로 엑셀을 밟게 해주세요." 아무리 기다려도 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기도의 언어도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
방언하게 해주세요, 제 혀가 저절로 돌아가게 해주세요"라고만 기다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언은 초자연적으로 혀가 꼬이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발을 내딛는 것은 내가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마음을 조용히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믿으십시오. "
성령님, 당신은 이미 내 안에 계십니다. 당신의 언어도 이미 내 안에 있습니다." 그 믿음 위에서, 입을 여십시오. 어떤 소리든 괜찮습니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소리를 입 밖으로 내기 시작하십시오. 내 입술과 혀를 성령께 맡기고, 내 이성의 통제를 잠시 내려놓고, 흘러나오는 소리를 막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어색할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 건지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요단강에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처음 방언을 시작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
따따따… 랄랄라… 이게 방언이 맞나요? 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한 아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기가 있습니다. "마마마… 바바바…" 이것이 언어입니까? 아직 완성된 단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아기는 이 옹알이를 통해 말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근육이 훈련되고, 소리가 다듬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유창한 언어가 됩니다. 처음부터 유창하게 말하는 아기는 없습니다.

방언도 그렇습니다. 처음의 어눌하고 단조로운 소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소리의 뜻을 다 아십니다. 그것이 옹알이 같은 소리라도,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고 믿음으로 입을 연 것이라면, 성령께서 그 기도를 받으십니다. 계속 믿음으로 사용하십시오. 날이 갈수록 더 풍성해지고 유창해집니다.

뉴질랜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집회에서 방언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50명이 모였습니다. 방언의 원리를 설명하고, 모두 함께 "
하나, 둘, 셋"을 세고 동시에 입을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47명이 방언을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3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금식도, 기도원 수련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원리, 이미 내 안에 있음을 믿고, 입을 여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이미 방언을 하시는 분들께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역할이 있습니다. 방언을 갈망하지만 아직 시작하지 못한 옆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함께 예배드릴 때, 함께 기도할 때, 당신의 방언 기도가 그 사람에게 영적인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성령의 불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붙듯, 당신의 믿음과 기도가 그 사람의 믿음을 일으키는 통로가 됩니다. 교회는 혼자 자라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적인 문을 열어주는 공동체입니다.

방언은 신비롭고 특별한 몇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영을 마음에 모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기도의 언어입니다. 당신은 이미 받았습니다. 이제 사용하면 됩니다. 요단강의 제사장들처럼,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으십시오. 입을 여십시오. 흘러나오는 소리를 막지 마십시오. 그 순간, 강이 갈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