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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거울처럼, 그러나 그리스도의 방패로 무례함 앞에 선 그리스도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9.

지훈은 입사 3년 차 대리입니다. 최근 프로젝트에서 좋은 성과를 냈고, 팀장에게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같은 부서 선배 하나가 자꾸 그를 비꼬기 시작했습니다.
"
이야, 요즘 잘나가시네. 팀장님이랑 아주 친하신가 봐?" "그 정도 성과로 그렇게 우쭐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지훈은 처음엔 웃어넘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반복되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그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너무 나댔나.' 자존감은 조금씩 깎여나갔고, 급기야는 다음 프로젝트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조차 망설여졌습니다. 잘하면 또 저런 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경험,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무례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직장인의 거의 대부분이 무례한 행동을 직접 겪거나 목격한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문제는 그 상처가 생각보다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뇌는 강렬한 감정의 기억을 더 쉽게, 더 자주 떠올리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례한 말 한마디가 하루 종일, 때로는 몇 주 동안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럴 때 쓸 수 있는 기술 몇 가지를 제안합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침묵입니다. 굳이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가 던진 미끼를 물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가요?"라고 되물어 상대가 스스로 자기 말을 증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는 화제 전환입니다. "아 그런데,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고 대화의 방향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이 기술들의 공통된 원리는 하나입니다. 무례한 사람은 사실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지배하지 못하면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도발에 흔들리지 말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라는 것이 이 조언들의 핵심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 방법들은 꽤 쓸모가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런 기술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세상의 처방은 결국 "
너 자신을 지켜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공격에 무너지지 말고, 자존감을 방어하고, 오히려 우위를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나쁜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방법 역시 여전히 같은 게임 위에 서 있습니다. 누가 더 우위에 서는가라는 게임 말입니다. 상대는 나를 깎아내려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 하고, 나는 여유로운 태도로 그 게임에서 이기려 합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규칙은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자리에 우리를 세웁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로마서 12:16~17) 그리스도인에게 무례함에 대한 대응은 자존감 방어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가치는 애초에 상대의 평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받아들여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느니라"(롬 5:8). 지훈이 그 선배의 말에 흔들린 진짜 이유는 그 말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정체성의 뿌리가 무의식중에 '동료의 인정'에 내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심리학도 어느 정도 진실을 짚습니다. 무례한 사람의 밑바닥에는 두려움과 열등감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다름 아닌 에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서로를 정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하와는 뱀을 탓했습니다. 죄가 들어온 순간,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인류는 똑같은 패턴을 반복합니다. 자기 존재를 스스로 세우지 못하니, 누군가를 밟고 서서라도 그 자리를 확인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지훈의 선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기 인생이 흔들리고 있다는 불안, 후배에게 뒤처지고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비꼬는 말이 되어 튀어나온 것뿐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우리는 그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어린아이가 떼를 쓴다고 겁먹는 어른은 없습니다.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무례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공격은 힘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례함과 조롱을 가장 극심하게 당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분을 고발할 때,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총독이 크게 놀랍게 여기더라"(마태복음 27:14) 빌라도가 놀란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을 방어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예수님이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조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라." 그러나 그분은 되받아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훗날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베드로전서 2:23) 여기서 그리스도의 침묵이 세상의 침묵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드러납니다. 세상은 침묵으로 상대를 김빠지게 만들어 심리적 우위를 점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방어하는 대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부탁하셨습니다.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는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한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신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례함 앞에서 침묵하고, 질문하고, 화제를 돌릴 때, 그 마음의 자리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침묵은 이제 '내가 너보다 여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행위가 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며 광야를 떠돌 때, 그는 자신을 변호하는 대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시편 18:2). 억울함을 증명하는 대신, 그 억울함을 아시는 분께 맡긴 것입니다.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대적들의 질문에 되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하시기 전, 그분은 먼저 "누구의 형상과 글이냐" 물으셨습니다. 이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 스스로 자신이 붙들고 있는 잣대가 얼마나 얕은 것인지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화제 전환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정죄하려는 무리 앞에서 예수님은 논쟁에 끼어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땅에 무언가를 쓰시며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를 여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무례한 정죄의 자리를, 은혜의 자리로 전환시켜버리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숨겨주다 나치 수용소에 갇혔던 코리 텐 붐은, 전쟁이 끝난 후 한 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뒤, 낯익은 얼굴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습니다. 다름 아닌 그녀가 갇혔던 수용소의 간수였습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순간 코리 텐 붐은 손이 굳어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의 언니는 그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
주님, 제 팔을 들어 올릴 힘을 주소서. 나머지는 주께서 하십시오." 그리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닌 사랑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여유로운 태도'와 그리스도인의 용서가 다른 지점입니다. 코리 텐 붐은 심리적 우위를 점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방어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녀를 위해 지불하신 용서가, 그녀를 통해 흘러나갔을 뿐입니다.

만약 지훈이 그 선배의 말에 여유롭게 "
아, 그런가요?"라고 웃어넘기는 법만 배운다면, 그는 결국 더 단단한 자존감의 성을 쌓는 법을 배운 것에 불과합니다. 언젠가 그 성이 무너지는 순간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지훈이 자신의 가치가 팀장의 인정에도, 선배의 조롱에도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값없이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것을 진심으로 붙든다면, 그는 더 이상 그 게임에 참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그러니 다음번에 누군가 무례한 말로 우리를 흔들려 할 때, 우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기술을 넘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 자존감을 지켜주소서"가 아니라, "주님, 저는 이미 주님의 것입니다.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이 세상의 방패보다 더 견고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방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