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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신앙으로 사는 삶 - 감정이라는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3.

지혜는 결혼한 지 삼 년 된 새댁이었습니다. 남편이 퇴근 후 또 야근이라며 늦게 들어온 어느 밤, 그녀는 식어버린 저녁상을 다시 데우다가 문득 눈물이 났습니다.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랬습니다. "당신은 맨날 그렇게 일만 하고 나는 안중에도 없지!" 남편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대화는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렸습니다.

지혜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늦을 때마다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외로웠어"라는,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너'를 향한 화살로 변해버렸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감정은 문 앞에 찾아온 손님과 같습니다. 초인종이 울리면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문을 열어줄 것입니까, 아니면 못 본 척 밀어낼 것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감정을 밀어내라고도, 마구잡이로 쏟아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손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정직하게, 그리고 사랑 안에서 맞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야 합니다. 참됨(정직)과 사랑, 이 둘이 함께 있어야 건강한 감정 표현이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정직하게 감정을 쏟아낸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다윗일 것입니다. 시편을 펼쳐보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시편 42:5)라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향해 질문합니다. 주목할 것은 다윗의 화법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상대(하나님)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라며 철저히 자기 자신의 상태에서부터 말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가 놓쳤던 부분입니다. "
당신은 맨날..."이라는 문장은 상대를 재판석에 세웁니다. 상대는 곧바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대화는 진실을 찾는 자리가 아니라 누가 옳은지를 다투는 전쟁터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나는 외로웠어"라는 문장은 다릅니다. 이것은 판결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상대를 심판석이 아니라 대화의 자리로 초대하는 문장입니다.

만약 지혜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
여보, 나는 당신이 늦게 들어올 때마다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마음이 허전해져. 당신이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말에는 남편을 향한 비난이 없습니다. 오직 아내 자신의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남편은 방어할 필요 없이, 오히려 아내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를 얻게 됩니다.

두 번째로, 건강한 감정 표현은 몇 가지 감정만 골라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을 정직하게 다 꺼내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좋으면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억누르고 늘 평안한 척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 앞에서
"내가 어찌 참으랴 내 마음이 상하였도다"(욥 6:11)라며 절규했습니다. 그의 말은 결코 다듬어진 신앙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원망과 슬픔과 혼란이 뒤섞인,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욥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욥기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 앞에 감정을 억누르고 교훈적인 말만 늘어놓았던 세 친구를 향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였다"(욥 42:7)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서운함과 원망이 뒤섞인, 여과되지 않은 감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녀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녀와 함께 우셨습니다(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은 이 구절은, 감정이란 억눌러야 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신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배우자에게, 가족에게, 지체에게 마음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운함 한 조각만 꺼내고 그 밑에 깔린 고마움이나 두려움은 감추어버리면, 상대는 우리의 진짜 마음에 결코 다가올 수 없습니다. 지혜가 만약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
나는 당신이 늦으면 속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게 우리 가정을 위해서라는 것도 알아서 미안하고 고맙기도 해.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저녁을 혼자 먹는 시간이 너무 외로워." 이렇게 여러 감정을 함께 꺼내놓을 때, 남편은 아내를 오해할 여지 없이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세 번째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듣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감정을 표현하는 대화는 나 혼자만의 독백이 아닙니다. 내가 마음을 열어 보인 만큼, 상대의 마음에도 귀를 기울여야 진짜 대화가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에서도 이를 배울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실 때, 그분은 곧바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고 물으시며 그들의 슬픔과 혼란을 끝까지 들으셨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들은 후에야 비로소 말씀을 풀어 설명하셨습니다. 경청이 먼저였고, 설명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지혜와 남편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만약 지혜가 자신의 서운함을 다 표현한 뒤 "
당신은 요즘 어때? 힘든 건 없어?"라고 물었다면, 남편도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부담인 어쩌면 상사의 압박이나 실적에 대한 불안을 꺼내놓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지혜는 남편의 늦은 귀가가 자신을 소홀히 여겨서가 아니라 그 역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표현과 경청이 함께할 때 비로소 오해는 이해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감정을 표현하기에 앞서 먼저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까? 우리의 감정은 언제나 정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 17:9)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시 139:23~24). 그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믿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가 검증받기를 구했습니다. 우리도 화가 나거나 서운할 때, 그 감정을 상대에게 쏟아내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이 감정이 정말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오해나 옛 상처에서 비롯된 착각인가?' 이렇게 질문하는 시간이 곧 기도이며, 그 기도를 통과한 감정만이 상대에게 상처가 아니라 이해를 낳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지혜와 남편의 이야기가 모든 부부, 모든 관계 속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침묵으로 마음을 곪게 하거나, 혹은 서툴게 쏟아내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제3의 길을 보여줍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정직한 고백, 감정을 여과 없이 온전히 드러내는 용기, 그리고 상대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겸손,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다윗처럼 먼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살피는 기도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의 권면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참됨 없는 사랑은 위선이 되고, 사랑 없는 참됨은 폭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되면서도 사랑스럽게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과 관계 속에서, 문 앞에 찾아온 감정이라는 손님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먼저 살핀 뒤 사랑 안에서 정직하게 맞아들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