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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저녁의 침묵, 그리고 참된 존재의 근원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8.

교회 안에서 조용히 섬기시던 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늘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은 뒤로 미루며 사셨습니다. 자녀들의 기대, 남편의 요구, 공동체의 시선 속에서 하루하루를 소진하듯 살아가셨습니다. 어느 날 심방 중에 그분이 목사님께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제가 오늘 하루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필요한 대로 움직였을 뿐이에요."

그 말씀을 들으며 목사님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떠올렸습니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타인의 의지에 끌려다니는 삶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그 통찰이, 그 권사님의 고백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하루의 끝, 고요한 저녁 시간을 본질을 탐구하는 시간으로 여겼습니다. 홀로 앉아 어지럽혀진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되짚는 그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참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라 본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귀한 통찰입니다. 성경도 분주함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삶을 경계합니다. 마르다처럼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다가 정작 주님 앞에 앉는 것을 놓치는 삶(눅 10:41~42)을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중하게 멈추어 서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존재의 근거를 '
스스로 생각하는 나'에게 두었습니다.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자아가 존재의 출발점이자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대 철학의 위대한 전환점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존재의 근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인간 존재의 근거를 자기 사유 능력에 두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숨결로 지음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 우리의 존재는 자기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더 깊이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손에서 지음을 받고 오묘하게 만들어졌음을 나의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나를 참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나의 사유가 아니라, 나를 아시는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만약 존재의 가치가 오직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에만 있다면, 사유 능력이 쇠퇴한 치매 환자나, 아직 자기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갓난아기, 혹은 순간의 판단력을 잃고 고통 속에 있는 이는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고 압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존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존재의 근거는 자기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식이며, 자기 사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소중히 여겼던 그 저녁의 고요함은 우리 신앙인에게 무의미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에게 저녁의 침묵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그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데카르트에게 저녁의 사유는 '
자기 자신을 향한 탐구'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저녁의 침묵은 '자기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다윗의 저녁 묵상은 자기 사유의 완성이 아니라, 이미 나를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확인이 아니라 자기 발견이었고, 자기 확립이 아니라 자기 항복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권사님은 이후 매일 저녁 십오 분씩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앉는 습관을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침묵으로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분은 고백하셨습니다. "
제가 저를 찾으려 했던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찾고 계셨다는 걸 알았어요." 그날 이후 그분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타인의 기대에 끌려다니던 삶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삶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것이야말로 데카르트의 명제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선언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셨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사유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확증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엡 1:4~5). 우리의 가치는 우리의 판단력이나 자율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옵니다.

이 질문을 그리스도인의 언어로 다시 물어봅니다. 오늘 하루,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존재했습니까? 분주함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기대에 끌려다니기만 하셨습니까, 아니면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아시는 그분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셨습니까?

오늘 저녁, 홀로 조용히 앉으십시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지으시고 나를 아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 앞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존재는 나의 사유에 달려 있지 않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