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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나쁜 말에 먹이 주지 않기, 무례함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서야 하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7.

정희 자매는 회사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고 나온 게 이번 주만 세 번째였습니다. 팀장은 그녀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아침마다 "애 엄마들은 회사를 놀이터로 아나 봐?"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회의 중에는 다른 사람이 늦어 생긴 문제를 그녀 탓으로 돌렸고, 그녀가 만든 기획안을 두고 담당자 앞에서 "이거 누가 이렇게 만들었대? 성의가 없네"라며 실소했습니다. 정희는 착한 신앙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참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참으셨겠지." 그렇게 매일 자신을 다독이며 견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참을수록 팀장의 말은 더 날카로워졌습니다. 마치 그녀의 침묵이 허락처럼 들린 듯이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그리스도인 자매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청년부에도, 직장에도, 심지어 가정 안에도 이런 '심술꾼'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
참는 것이 신앙"이라는 오해 속에서, 정희처럼 조용히 무너져갑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성경의 빛 아래서 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그 성선설을 강하게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없는 사람 취급하며 따돌리고, 농담을 가장해 상처를 주고, 말을 끊고, 협박하고, 책임을 떠넘기고, 거짓말로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 앞에서 묻고 싶어집니다. "
정말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그러나 성경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질문에 놀라지 않습니다. 로마서 3장은 이미 답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인간의 전적 타락은 신학의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매일 우리가 마주치는 회의실과 단톡방과 시댁 식탁 위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현실입니다. 정희의 팀장이 특별히 괴물이어서가 아닙니다. 은혜로 붙들리지 않은 인간의 마음이 원래 그런 모습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례한 사람 앞에서 당황하고 상처받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에 신학적으로 놀랄 이유는 없습니다.

하버드 협상연구소의 더글러스 스톤은 "
나쁜 행동에 보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여기서 나쁜 행동이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고의로 상대를 위협하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등이 싫어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양보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나쁜 행동에 '먹이'를 준 셈이 됩니다. 상대는 자신의 나쁜 행동이 통했다는 것을 학습하고, 다음에는 더 강도 높게 반복합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성경의 지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는 끊임없이 그를 조롱하고 위협하고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로 불러내려 네 번이나 사람을 보냈습니다. 느헤미야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이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느 6:3). 느헤미야는 그들의 조롱에 반응하지도, 그들과 똑같이 되갚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성벽 쌓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나쁜 행동에 먹이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치던 그에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붓고 돌을 던지며 따라왔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 16:7). 다윗의 부하 아비새는 당장 가서 그의 목을 베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막았습니다. 그렇다고 시므이의 말에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 상황을 맡기며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침묵하되 굴복하지 않는 것, 무시하되 자신의 소명을 계속 이어가는 것, 이것이 느헤미야와 다윗이 보여준 지혜였습니다.

의사소통 전문가 퍼트리샤 에반스는 언어폭력을 "
상대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지만 물리적 폭력 못지않은 고통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심술꾼은 상대의 인식, 경험, 가치, 성취를 무시하고 부정하며, 현실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묘사는 요한복음 8장 44절의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기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언어폭력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결국 거짓의 아비, 곧 사탄을 만납니다. 심술꾼이 상대의 현실과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만드신 한 인격체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는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언어폭력 앞에서 침묵으로 방치하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때리는 대제사장의 하인 앞에서 무조건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된 것을 증언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23). 예수님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분명하고 침착하게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모델이 됩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되갚아주면 될까요? 이 글은 맞불작전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관계뿐 아니라 자신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고,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피장파장'으로 볼 뿐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나쁜 행동을 합리화할 명분을 줍니다.

성경도 동일하게 경고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그러나 로마서 12장은 그저 참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놀랍게도 성경은 굴복도 아니고 보복도 아닌 제3의 길, 곧 '적극적인 선'이라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는 나약한 순응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의 양심을 찌르는 능동적이고 강력한 대응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무례함에 대해 침묵만 지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은 형제가 죄를 범하면 "
먼저 가서 그와 너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가르칩니다. 필요하다면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데려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단호함'입니다. 침묵도 폭발도 아닌,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엡 4:15).

글은 죄책감 없는 사람에게는 '나'로 시작하는 완곡어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
네가 나를 그렇게 대할 때마다 무시받는 기분이 든다"는 식의 말은 오히려 "그렇게 느끼는 네가 문제"라는 반격을 부릅니다. 대신 "네가 나한테 말할 때는 더 부드러운 말투였으면 해"처럼 '너'를 주체로 한 분명한 요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이런 단호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미혹하던 거짓 교사들에게 바울은 부드러운 완곡어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부당하게 바울을 치라고 명령했을 때도 바울은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행 23:3)라고 단호히 응수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부드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 사랑은 명확한 선 긋기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신경과학자 로버트 사폴스키는 무례함을 오래 경험하면 면역체계까지 영향을 받는다고 밝혔습니다. 스트레스가 심장질환, 암, 당뇨 발병률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성 근로자를 10년간 추적한 연구는 업무 스트레스가 심장질환 발병률을 38%나 높인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57개국 중 직장 행복도 49위에 머물렀고, 특히 상사와 동료의 무례함에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고전 6:19)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함부로 방치할 권리가 없습니다. 정희 자매가 매일 화장실에서 울며 참기만 하는 것이 신앙의 인내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은 하나님이 맡기신 몸과 마음을 병들게 방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고 분명히 말하는 것도 청지기 직분의 일부입니다.

정희 자매는 어느 날, 팀장이 또 "
애 엄마 티 내지 말라"고 웃으며 말하는 순간, 처음으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팀장님, 저는 그 말이 들을 때마다 힘듭니다. 앞으로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회의실은 잠시 얼어붙었습니다. 팀장은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런 농담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희가 배운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참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침묵하는 것과 온유한 것은 다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쌓으며 조롱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결코 성벽 쌓기를 멈추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침묵하셨지만, 부당한 대우 앞에서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나쁜 말과 행동에 먹이를 주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진실과 사랑 안에서 말할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이들의 영혼까지도 지키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