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세기 6:4)
우리는 신앙을 이야기할 때 흔히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많은 경우 우리는 믿음보다도 세상의 힘을 더 크게 의지합니다. 특히 오늘날 이 힘은 곧 돈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단순히 생활에 필요한 도구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돈을 인격적 주인으로, 곧 하나님과 경쟁하는 또 다른 ‘주(主, 큐리오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왜 그렇게 돈에 마음을 빼앗길까요? 돈 자체는 사실 단순한 종이와 숫자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회가 약속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 스스로 힘을 발휘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탐욕이 가득한 인간이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돈은 곧 권력과 지배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돈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채우는 저주의 도구로 변합니다.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조금 가지면 더 갖고 싶고, 채우면 채울수록 공허가 커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돈을 우상으로 삼는 이 길을 네피림 신앙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시고 우리의 용사이신데, 스스로 힘을 가지려는 교만이 돈 숭배로 이어집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 논리에 젖어 있는 모습은 바로 이 네피림 신앙의 현대판입니다. 교회가 부와 명예를 쌓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저주받을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돈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부, 명예, 건강 등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은 결코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흘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곧 나눔입니다. 나눔은 단순히 가진 것을 떼어 주는 차원을 넘어, 십자가의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이 비움과 낮아짐 속에서 우리는 참된 부요함을 얻었습니다(고후 8:9).
교회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서로의 것을 나누며 유무상통했습니다(행 2:44~47).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삶은 곧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마 25:31~46).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가난한 자를 두셔서(신 15:11), 우리가 그들을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십니다. 나눔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천국의 삶을 미리 맛보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비우고 나누는 삶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더 많이 가져라’고 속삭이지만, 주님은 ‘더 많이 흘려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유욕은 우리를 옭아매지만, 나눔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탐욕은 결국 우리를 저주로 이끌지만, 나눔은 십자가의 길로, 그리고 부활의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세상의 거인 숭배, 곧 돈 숭배에 젖어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따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재물을 섬길 것이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곡된 혼인 관계와 하나님의 심판 (0) | 2025.09.03 |
---|---|
거인 숭배 문화에 젖어 있는 교회 (4) | 2025.08.27 |
거인의 힘과 십자가의 힘 (2) | 2025.08.24 |
거인 숭배 문화 속에서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 (0) | 2025.08.21 |
노아의 방주와 저주의 물 위를 걷는 분 (4) | 2025.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