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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거인 숭배 문화 - 돈과 나눔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8. 31.

“그 때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세기 6:4)

우리는 신앙을 이야기할 때 흔히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많은 경우 우리는 믿음보다도 세상의 힘을 더 크게 의지합니다. 특히 오늘날 이 힘은 곧 돈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단순히 생활에 필요한 도구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돈을 인격적 주인으로, 곧 하나님과 경쟁하는 또 다른 ‘주(主, 큐리오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왜 그렇게 돈에 마음을 빼앗길까요? 돈 자체는 사실 단순한 종이와 숫자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회가 약속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 스스로 힘을 발휘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탐욕이 가득한 인간이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돈은 곧 권력과 지배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돈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채우는 저주의 도구로 변합니다.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조금 가지면 더 갖고 싶고, 채우면 채울수록 공허가 커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돈을 우상으로 삼는 이 길을 네피림 신앙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시고 우리의 용사이신데, 스스로 힘을 가지려는 교만이 돈 숭배로 이어집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 논리에 젖어 있는 모습은 바로 이 네피림 신앙의 현대판입니다. 교회가 부와 명예를 쌓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저주받을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돈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부, 명예, 건강 등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은 결코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흘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곧 나눔입니다. 나눔은 단순히 가진 것을 떼어 주는 차원을 넘어, 십자가의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이 비움과 낮아짐 속에서 우리는 참된 부요함을 얻었습니다(고후 8:9).

교회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서로의 것을 나누며 유무상통했습니다(행 2:44~47).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삶은 곧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마 25:31~46).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가난한 자를 두셔서(신 15:11), 우리가 그들을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십니다. 나눔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천국의 삶을 미리 맛보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비우고 나누는 삶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
더 많이 가져라’고 속삭이지만, 주님은 ‘더 많이 흘려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유욕은 우리를 옭아매지만, 나눔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탐욕은 결국 우리를 저주로 이끌지만, 나눔은 십자가의 길로, 그리고 부활의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세상의 거인 숭배, 곧 돈 숭배에 젖어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따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
너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재물을 섬길 것이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