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다윗의 이 고백은 단순한 시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의 현실 속에서 터져 나온 ‘경험자의 고백’입니다. 그는 지금 왕궁이 아니라 광야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목이 타들어가며, 생명조차 위태로운 곳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단순한 지식의 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앎’은 책 속의 정보나 설교를 통해 들은 지식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과거에 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경험이 있었습니다(2절). 그 체험이 있었기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그 하나님을 다시 찾고, 다시 사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3절) 이것이 바로 은혜의 경험자가 고백하는 언어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사랑,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리 거친 땅에서도 찬양을 잃지 않습니다.
광야의 삶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들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6절)
그는 외로운 밤에도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 기억이 그를 지탱했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나의 도움이 되셨다는 그 ‘기억’이, 현재의 두려움을 이기게 했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다시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5절) 이것은 단지 은유가 아닙니다. 그가 실제로 광야 한가운데서 영혼의 배부름을 경험했다는 고백입니다. 물 한 방울 없는 땅에서 ‘만족’을 누리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사랑을 다시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광야에서 피어나는 참된 신앙의 꽃입니다.
당신은 은혜의 경험자인가? 다윗의 찬양은 체험 없는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광야에서도 찬양하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한 사람, 그분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은 압니다. 그 기억 하나로 살아갑니다. 그 은혜 하나로 다시 일어섭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광야 한가운데에 있습니까? 모든 것이 메마르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처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셨던 그때를, 눈물로 당신을 위로하셨던 그날을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모하십시오. 다윗이 “새벽에 주의 말씀을 읊조리며” 주님을 찾았던 것처럼, 당신도 오늘 새벽, 조용히 그분을 불러보십시오. 광야 한가운데서도 당신의 영혼은 기름진 음식으로 배부를 것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8절) 그분의 손은 여전히 당신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그분을 경험하십시오. 당신의 신앙은 바로 그 기억 위에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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