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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값으로 사신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19.

고린도전서 7장 21~24절, 현대인의 성경.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거든 차라리 그 길을 찾으십시오.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종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며 부르심을 받을 때 자유인이었던 사람도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으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기원후 50년대, 고린도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배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상인과 선원과 노예가 뒤섞였습니다. 이 도시의 한 부잣집 부엌에서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종이 새벽부터 물동이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얼마 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밤마다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뜨거움 한편에 걱정이 자라났습니다. '나는 주인 허락 없이는 집회에도 못 가는 몸이다. 시간도 재물도 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교회에 가 보면 걱정은 더 깊어졌습니다. 자유인 성도들은 집을 내어 주고 헌금을 하고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오네시모는 구석에 앉아 자기가 초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부르신 게 맞을까?'

이 걱정이 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사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전체가 던진 질문과 한 뿌리였습니다. "
어떻게 하면 성도답게 살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여기서 바울이 하려는 말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신분, 힘, 재산, 나이, 건강 같은 조건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종이어서 덜 부르신 것도 아니고, 자유인이어서 더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종으로 그냥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곧바로 덧붙입니다.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자유가 올 기회가 있으면 감사히 붙잡으면 됩니다. 다만 그 자유가 사람의 값어치를 올려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종은 종이 아니고 자유인도 자유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사신 분의 종입니다.

종이라는 신분은 이제 우리 곁에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사람에게 매이는 일도 사라졌을까요? 한 직장인이,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농담에 웃어 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쓰립니다. 하지만 집 대출금이 있고 아이들 학원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상사의 표정부터 살핍니다. 법적으로는 자유인이지만 마음은 눈치의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성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비교합니다. 젊고 건강해서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작아 보입니다. 기도를 오래 하고 전도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면 '나도 더 성도다워져야지' 하고 결심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결심을 경계합니다. 성도다운 모습으로 인정받으려는 마음에는 은근한 자기 자랑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어느새 나를 값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자기 고백을 이렇게 풀어 놓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그는 이 모순 앞에서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탄식합니다. 훗날에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문제는 가난이나 신분이나 부족한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죄였습니다. 그리고 죄는 종이든 자유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똑같이 우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물이 새는 배 위에서 선원들이 서로의 갑판 청소 솜씨를 비교하고 있다고 합시다. 누가 더 깨끗이 닦았는지를 두고 한참 다툽니다. 하지만 배 밑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갑판이 얼마나 반짝이는지는 가라앉는 배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견주는 기도, 봉사, 전도, 지위, 재산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구멍 앞에서는 모두 같은 높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분 따지기를 멈추게 합니다. 사람이 복된지 아닌지는 종이냐 자유인이냐에 달려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모읍니다. "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노예 시장을 아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값으로 샀다'는 말은 바로 와닿는 표현이었습니다. 어느 시장에서 한 노예가 팔려 나간다고 해 보십시오. 이제 그의 주인은 새로 정해졌습니다. 그가 누구에게 속하는지는 그가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값이 치러졌느냐로 정해집니다.

우리를 산 값은 금이나 은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사신 것이 아니라 비참한 자리에서 건져 내시려고 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치는 우리 행실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를 위해 치러진 그 값에서 나옵니다. 그 값이 치러진 이상 사람의 시선이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상사의 눈치도, 교회 안의 비교도, 세상이 매기는 점수도 더는 우리를 쥐고 흔들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분의 것입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넘어집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는데도 마음은 자꾸 세상의 인정으로 기웁니다. 머리로는 그리스도가 가장 귀한 분이라고 알면서도 삶에서는 나를 귀하게 해 줄 다른 것을 찾습니다.

여기서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면 이제 죄를 안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죄 없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래서 감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 죄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순간이 오히려 위험합니다. 죄를 이겨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이미 또 하나의 자기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물동이를 이고 걷다가 문득 바울의 말을 떠올립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부르신 분의 마음을 가로막지 못했다. 나는 값으로 사신 사람이다. 주인이 아무리 나를 부려도 나의 마지막 소유자는 그분이다." 그의 걱정이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새로운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쓸모 있는가를 따지던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대신 자기를 위해 값을 치르신 분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부엌의 물동이도 더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감사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조이고 있다면 먼저 그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단 한 번도 성도다운 적이 없는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복음에 눈이 열리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곤고한 존재인지를 보게 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의 능력과 은혜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값으로 사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매이지 말고,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