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7장 25~31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주일 예배가 끝난 뒤, 교회 앞 계단에서 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려면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들으니 그게 아닌가 싶어요." 목사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본문은 고린도전서 7장 25절부터 31절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신앙과 삶의 분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실천하지 않는 삶"으로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말하려는 분리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실천이 있으면 신앙과 삶이 일치한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바르게 알지 못한 데서 나온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퇴근길 지하도에 노숙인이 힘없이 누워 있습니다. 마음이 쓰여 천 원짜리 한 장을 놓고 갑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한 순간 같습니다. 그런데 몇 걸음 더 가니 또 다른 노숙인이 있고, 그 옆에도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를 도울 수는 없으니 슬그머니 눈을 돌리게 됩니다. 다음 날 같은 자리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어제 도왔으니 오늘은 지나가도 되겠지" 하는 계산이 시작됩니다. 실천을 기준으로 삼으면 끝이 없습니다. 어디까지 해야 충분한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는 흔히 "성도는 이혼하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가겠다면 가게 두라고 하고, 그런 일에 매이지 말라고 합니다. 또 교회는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며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성도는 교회에서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정말 신앙과 삶의 일치일까요? 목사님은 윤리와 도덕, 오래된 전통을 기준으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성도를 막다른 길로 모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처녀에 대해서는 주께 받은 계명이 없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의 의견은 임박한 환난 때문에 사람이 지금 있는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혼한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독신이 좋다는 것인지 결혼이 좋다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그 이유는 바울과 우리가 결혼을 바라보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한 선택으로 봅니다. 바울은 복음의 자리에서 봅니다. 그가 말한 임박한 환난은 그리스도의 재림, 곧 세상의 끝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끝나는 날에 영원한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뿐입니다. 그러니 종말의 눈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인생에서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는 일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종말을 바라보는 눈이 열릴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종말 의식이 없으면 마지막 날은 희미한 그림자로 남고, 눈앞의 현실만 또렷해집니다. 그러면 신앙의 관심도 자연히 내 인생을 즐겁고 편하게 해 줄 조건들로 옮겨 갑니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역 대합실에 앉아 있습니다. 의자가 딱딱하다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고, 자리가 푹신하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점의 간식에 마음을 빼앗기고, 어떤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아 가방을 풀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모두 곧 기차를 타고 떠납니다. 대합실이 아무리 편해도 거기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입니다.
그 와중에 자기가 탈 기차를 아는 사람은 다르게 앉아 있습니다. 의자가 불편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매점 앞에서도 마음을 뺏기지 않습니다. 대합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앉을 자리가 있으니 감사하고 물을 사 마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곳이 종착지가 아님을 아니까 붙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29절에서 31절까지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같이,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자같이, 물건을 사는 자는 가지지 못한 자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양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쾌락의 도시였습니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몸의 즐거움으로 얻는다는 쾌락주의가 사람들 마음에 깊이 스며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결혼도 행복이라는 범위 안에 있는 선택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기 행복에 마음이 기울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쾌락을 멀리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쾌락을 악으로 보고 억누르며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금욕주의 역시 그가 경계한 길이었습니다. 쾌락으로 행복을 찾든 금욕으로 행복을 찾든 자기 행복에만 목표를 둔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임박한 환난"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한 번에 상대화합니다.
이 말씀은 오해하기 쉽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사라질 텐데 지금 삶은 아무 의미 없네" 하고 받아들이거나, "아내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라고?" 하고 놀랄 수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직장도 가정도 내려놓고 모여 살며 종일 기도만 하는 것이 종말의 삶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현재의 삶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있고, 울 일이 있고, 기쁜 일이 있는 것이 지금의 삶입니다. 그 삶은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다만 거기에 붙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에 말한 신앙과 삶의 일치인 것입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는 얼마나 많이 실천했느냐로 드러나지 않고, 자유로 드러납니다.
설교자는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비춰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의 기준은 "내가 행복한가?"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군사력을 키우는 나라와 닮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필요한 것은 더 열심히 하자는 다짐이 아니라, 내 신앙이 모순 속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것이 옳다"고 말했다 해도 우리가 옳은 것만 골라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아온 방식은 옳고 그름을 따져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이익이 되는 쪽을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선택의 한가운데에 늘 내가 있습니다. 독신이냐 결혼이냐를 고민하는 것도 결국 나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따라 산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8장 24절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인 줄 믿지 않으면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이 운명입니다. 환난의 날이 오면 독신이든 기혼이든, 스스로 불행하다 여긴 사람이든 행복하다 여긴 사람이든 똑같은 끝을 맞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 운명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의 은혜가 우리를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세우셨고 생명에 속한 사람으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이제는 성도를 붙들어 두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새로운 부름 안에 있습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 필요하고 좋은 것을 요구하며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자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드리려고 내 요구를 억지로 접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셔서 이루시고 받으십니다.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일하시는 현장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를 부활 생명의 세계에서 영원히 함께할 백성으로 남기시려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낼 수 있고, 있어도 없는 것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환난 앞에서는 세상의 무엇도 힘이 되지 못합니다. 환난을 견디게 하고 건져 줄 것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1장에서 고백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는데,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청년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목사님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는 것으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몸으로 사는 한 고난은 있습니다. 결혼해도, 돈을 벌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을 이루어도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없음을 알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만이 참된 기쁨임을 믿고 그분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청년은 계단을 내려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월요일에 해야 할 일도, 마음에 걸리는 걱정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조금 전보다 가벼워 보였습니다. 있는 것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지나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을 붙들고 계신 분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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