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7장 8~11절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어릴 적 우리는 누구나 숙제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숙제를 잘 해내면 선생님의 도장을 받고, 그 도장은 곧 "나는 성실한 학생이다"라는 증명서가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합니다. 하나님이 내주신 숙제를 성실하게 해내고, 그 대가로 "참 잘했다"는 도장을 받아내려는 마음, 그리고 그 숙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마다 가정 사역 세미나가 열리고, 이름도 다양한 '행복한 부부 십계명'이 유행합니다. 왜 이런 것들이 이렇게 환영받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연중에 이렇게 믿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신앙인다운 삶이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그런데 이 말을 곰곰이 뜯어보면 이상한 지점이 나타납니다. 만약 행복한 가정이 신앙의 증거라면, 평생 결혼하지 않은 사도 바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바울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8절) 이 말 한마디만으로도, '행복한 가정이 곧 신앙의 증표'라는 오늘날의 통념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29절에서 더 놀라운 말을 던집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아내를 "없는 자 같이" 여기라는 말을 듣고 좋아할 아내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대로 살았다가는 당장 저녁 식탁에서 냉랭한 침묵이 흐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정말 가정의 행복을 반대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애초에 결혼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정말 붙들고 있는 주제는 따로 있습니다. 다만 고린도 교인들이 결혼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기에, 그 익숙한 질문을 입구 삼아 더 중요한 진리로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본문을 '결혼과 이혼의 규정집'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잠깐,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한 사람이 평생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병원 대기실에서 인테리어 잡지를 뒤적이며 벽지 색깔을 고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작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작은 문제에 마음이 온통 쏠려버리는 것 말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인들의 결혼 고민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운데, 마음은 온통 "결혼하는 게 행복할까, 안 하는 게 행복할까"에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고민의 실체를 정확히 짚어냅니다. 결혼할까 말까를 놓고 씨름하는 그 마음의 중심에는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행복'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잊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비단 결혼 문제만이 아닙니다. 사업이 잘 풀리고 삶이 평안할 때 우리는 곧잘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정작 그 평안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것을 보며 안심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편안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오늘날 사람 중에 "절제가 안 돼서" 결혼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서 결혼합니다. 그러니 바울의 이 말은 현대인의 결혼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처럼 들립니다.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고린도라는 도시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금욕주의 사상의 영향이 짙은 곳이었습니다. 금욕주의는 절제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습니다. 이런 사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는 '절제하는 것' 자체를 신앙의 훈장처럼 여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중에 자신의 정욕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논리가 드러납니다. 절제할 수 없으면서도 억지로 결혼하지 않은 채 그것을 신앙의 훈장처럼 붙들고 있느니, 차라리 결혼해서 자신이 절제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솔직히 인정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나는 수영을 잘한다"고 허세를 부리다 익사하는 것보다, "나는 수영을 못 한다"고 솔직히 외치고 구조 튜브를 잡는 편이 낫듯이 말입니다.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은혜를 향해 열려 있는 태도입니다.
그다음 바울은 10~11절에서 결혼한 이들에게 이렇게 명합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바울이 이 명령의 출처를 굳이 "주(예수님)"라고 밝힌 이유는, 마태복음 19장 6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단순히 '이혼 금지법'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이것을 그저 규칙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도는 절대 이혼하면 안 된다"는 새로운 율법이 하나 더 생겨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 용서와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은 자기 노력과 자기 의로 신앙을 증명하려는 또 하나의 규칙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은혜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치 병에서 회복된 환자가 퇴원 후에도 계속 병원 규정을 지키는 것 자체를 건강의 증거로 삼으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규정 준수가 아니라 실제로 회복되었느냐는 것인데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혼한다고 해서 영광이 사라지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자기 의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이 "갈라서지 말라"고 한 진짜 이유는 결국 이것입니다. 결혼도 자기 행복을 위해서, 이혼도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성도는 바로 그 '자기 행복'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유지하든 이혼을 하든, 그 결정의 중심에 여전히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물론 성도가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니 무조건 고생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고행일 뿐입니다. "이렇게 살아야만 진짜 신앙이다"라는 또 다른 틀을 세우는 것 역시 인간의 오랜 습관입니다. 인간은 기회만 되면 규칙과 틀을 만들어 자기를 그 안에 가두고, 그 틀 안에 있는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진리로 인한 참된 자유를 잃게 하고서도, 스스로는 여전히 자유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29절과 31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29절)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31절) 예수님이 오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차피 다 지나가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허무주의나 쾌락주의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에 붙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께 묻고 싶습니다. 결혼이 크고 중요한 문제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크고 중요한 문제입니까? 머리로는 분명히 후자라고 대답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예수님 오시는 날은 아직 멀었고, 결혼은 지금 당장 내 눈앞의 현실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학생이 학교에 가서 잔뜩 숙제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듯, 목사에게서 "이렇게 살아라"는 새로운 숙제를 받아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확인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잃었을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라"는 하나님의 숙제를 지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숙제를 완전히 끝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에, 성도는 이제 그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세상의 겉모습들은 결코 궁극적인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잠시 반짝이는 듯 보여도 결국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결혼을 마치 행복의 열쇠인 양 붙들지 않습니다. 영원한 행복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저 살아가면 됩니다. 불안과 염려에 붙들리지 않고 그냥 사는 것,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안에 이미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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