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7장 1~7절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어느 교회에 오랫동안 다투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그 말에 반발했습니다. 교회는 이 문제로 시끄러웠고, 결국 바울에게 편지를 써서 답을 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단순히 "결혼이 좋으냐 독신이 좋으냐"에 대한 지침서로 읽으면, 정작 바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놓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뒤에는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로 새롭게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 철학, 그중에서도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 사상이 깊이 뿌리내린 도시였습니다. 이 사상은 정신에 속한 것은 선이고 육체에 속한 것은 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체적 욕구를 억누르고 절제하는 삶이야말로 참된 경건이라고 여겼습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일 찬물로 샤워를 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스스로를 혹독하게 단련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저 사람은 정말 절제력이 대단하다, 참 경건하다"고 감탄합니다. 하지만 그 절제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증명이라면 어떨까요?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이 바로 이런 식으로 신앙을 이해했습니다. 헬라 철학을 받아들인 채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독신으로 지내며 금욕하는 것이 곧 신앙의 의로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것 자체가 영적 우월함의 증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정말로 독신을 신앙적으로 더 우월한 삶이라 여겼다면, "가능하면 다들 나처럼 독신으로 지내라"고 명확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7절)
이 말의 핵심은 "결혼하면 결혼한 대로,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결혼 여부가 신앙의 기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치 어떤 회사에서 정장을 입든 캐주얼을 입든 그것이 그 사람의 업무 능력을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결혼했느냐 안 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울처럼 독신으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 바울처럼 자신의 어떤 행위도 신앙의 증거로 내세우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는 그의 고백이 이를 증명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왜 결혼하세요?"라는 질문에 "저 사람과 함께하면 행복할 것 같아서요"라고 답합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울의 시각에서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결국 결혼도 "자기 행복을 위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이는 독신을 자기 신앙의 증표로 삼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 다 "자기를 위해" 하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위해 살겠다고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의 주제는 늘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필요한 것"으로 흘러갑니다. 배우자는 어느새 내 행복을 완성해주는 수단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결혼이라는 형식은 갖췄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2절에서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두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 합니다. 실제로 결혼했다고 해서 음행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부정한 일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이 구절의 핵심은 "결혼이 음행을 막아주는 안전장치"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4절과 5절은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이것을 단순히 부부 간의 성적 의무에 대한 규정으로만 읽으면 너무 좁게 읽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진짜 말하고 있는 것은, 성도의 몸이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나중에 6장 18~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비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은행에서 큰돈을 빌려 집을 샀다면, 그 집의 명의는 자신의 것이지만 실제로는 은행이 담보권을 쥐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마음대로 집을 팔거나 헐어버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집이 이미 다른 값을 치르고 매인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몸도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의 피값으로 산 것이기에, 더 이상 내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한 부부 사이의 관계에서 실감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결혼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내가 원치 않아도 배우자의 필요에 따라 움직여야 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집안일을 부탁하면 피곤해도 일어나야 하고, 남편이 힘든 하루를 보냈다고 하면 내 계획을 미루고 곁을 지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관계 자체가 "내 몸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게 하는 훈련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금욕주의와 정반대로 보이는 또 하나의 사상, 이원론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원론은 "정신만 바르면 육체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육체는 어차피 악한 것이니, 육체로 짓는 죄는 영혼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금욕주의와 이원론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갈래입니다. 둘 다 육체를 하나님과 무관한 것,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하나는 육체를 억눌러서 신앙을 증명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방치해서 신앙과 분리시키려 합니다.
바울은 이 둘 모두를 거부합니다. 몸은 악한 것도 아니고 무가치한 것도 아닙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입니다. 억누르는 것도, 방치하는 것도 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한 것으로 살아내는 것이 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결혼했는지 안 했는지, 독신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의 형태를 살든 그 삶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목표를 생존과 행복에 둡니다.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건강한 자녀, 이 모든 것을 통해 행복을 이루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속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잠시의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여전히 불안과 염려 속에 흔들리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성도에게는 전혀 다른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확신입니다. 이것은 내가 결혼을 했는가 안 했는가, 얼마나 절제하며 살았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지체 됨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결국 이것입니다. 결혼하든 하지 않든, 어떤 삶의 형태를 살든, 그것 자체가 신앙의 증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더 이상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말한 것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형태 속에서 차별 없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자리에서, 독신인 사람은 독신인 자리에서, 각자 받은 은혜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새롭게 된 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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