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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몸의 주인은 누구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어느 성도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
목사님, 저는 매일 기도하고 성경도 읽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치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사실 우리 모두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평안을 원합니다. 걱정 없이, 근심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복잡해지고, 결국 신앙은 주일 예배 출석이라는 최소한의 의무로 쪼그라들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성경에서 듣고 싶어 하는 말과 성경이 실제로 증거하는 말씀 사이에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
예수 믿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실천하며 살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예수님이 굳이 성령을 보내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상상해 보십시오. 3년을 동고동락하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말씀을 다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초등학생에게 대학원 수업을 들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아예 경험해 본 적 없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이 진리를 들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던지는 말씀이 바로 그런 종류의 말씀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19절). 이 한 문장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이 말을 이론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치 회사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이 옷은 회사 소유입니다"라고 서류에 서명하는 것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은 어떻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체중계 위에 올라서서 한숨을 쉬는 그 모든 순간, 우리는 몸을 철저히 "
내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아무리 머리로 "내 몸은 하나님의 것"이라 되뇌어도, 몸으로 살아가는 매일의 현실에서는 자기 성취와 자기만족을 향한 욕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
목사님, 어떻게 살면 구원도 받고 복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질문 안에는 이미 몸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내가 몸을 잘 통제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겠다"는 계산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판기 앞에서 정확한 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음료가 나오리라 기대하듯, 우리는 신앙마저도 내가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바울은 몸을 "
성령의 전"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빠지는 오해가 있습니다. "성전이니까 깨끗하고 거룩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술, 담배를 금하라는 논리로 이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성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셨는데, 요한은 이것이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요 2:19~21).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느 박물관에 아주 오래된 유물이 하나 전시되어 있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유리 진열장을 보며 감탄하지만, 정작 그 유물이 값진 이유는 유리 진열장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역사와 사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몸 자체를 깨끗이 관리한다고 해서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은총이 그 안에 거하실 때, 비로소 몸은 성전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20절). 우리는 이 말을 흔히 "선한 행실로 칭찬받으라"는 뜻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음행은 죄, 절제된 생활은 영광이라는 도덕적 계산법으로 이 말씀을 읽어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자기 몸을 불태워 순교하는 것과 같은 최고의 도덕적 헌신조차도,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성실하게 회사에 다니며 월급을 받아도, 그 돈으로 남의 빚을 갚을 수는 없습니다. 도덕적 선행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으로 죄의 값을 치를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예외가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종교적으로 열심인 사람도 이 선언 앞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울은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그 값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의 피였습니다(행 20:28). 이것을 이렇게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사람이 빚 때문에 팔려가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알지도 못하던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의 전 재산, 아니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그 사람을 사서 자유케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 후로도 "이건 내 몸이니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제 자신을 산 사람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한 그의 삶은, 억지로 하는 봉사가 아니라 감사에서 흘러나오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 몸에서 어떤 의로움도 발견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선행이라 여겼던 것조차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런 나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셨다는 사실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것, 그것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전으로 산다는 것은 특별한 도덕적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몸에서 죄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며, 그럼에도 나를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
나의 영광과 존재 가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 자체를 내려놓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나 또한 다시 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더 이상 "내 몸"이라 부를 수 없는 자리, 그것이 성령의 전으로 사는 성도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