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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차라리 손해 보아라, 잊혀진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7.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고린도전서 6:6~8)

몇 해 전, 작은 개척교회에 다니던 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분이 다른 분에게 인테리어 공사를 맡겼는데, 자재비 문제로 다툼이 생겼습니다. 서로
"속았다", "바가지를 씌웠다"며 언성이 높아졌고, 결국 한 분이 소액재판을 걸겠다고 나섰습니다. 담임목사가 중재에 나서 "형제끼리 이러지 말자"고 했을 때, 그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이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입니다. 잘못한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죠."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갑니다. 잘못한 자는 처벌받고, 피해를 본 자는 보상받아야 공정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전혀 다른 말을 던집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 이 말씀을 처음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으라는 것인가? 사기를 당해도 눈감으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세상은 오히려 불의한 자들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많은 성도가 이 구절을 '사랑의 실천'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불의를 당해도 형제를 고발하지 않고 참아주는 것, 속아도 눈감아 주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해석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누가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손해 보지 않으려 합니다. 한 번은 참을 수 있어도, 같은 일이 반복되면 반드시 분노가 치밉니다. 계속해서 불의를 당해주고 속아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당신 자신도 잘 아실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손해만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바울의 말을 '성도라면 참고 손해 봐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짐은 결국 우리를 지치게 하고, 위선자로 만들 것입니다. 바울은 애초에 고린도 교회가 세상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공동체가 되기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복음은 뛰어난 도덕성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요?

한 부잣집에 신실한 창고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곡식과 재물을 오랫동안 관리해왔습니다. 어느 날 이웃이 그 창고에서 곡식 몇 가마를 훔쳐 갔습니다. 창고지기는 분노하며 이웃을 관아에 고발했습니다.
"내 곡식을 훔쳐 갔다!" 그런데 정작 그 곡식은 창고지기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창고지기가 분노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관리하던 것을 마치 자기 소유인 양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소송을 통해 '내 것'을 지키려 하지만, 그 '내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이미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을 보면 하나님은 도둑질과 손해에 대해 엄격한 배상법을 주셨습니다. 소 한 마리를 훔치면 다섯 마리로, 양 한 마리를 훔치면 네 마리로 갚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배상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짜 배상받아야 할 분은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도, 그 땅의 소산도 모두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땅에서 '내 소유'와 '네 소유'를 나누고, 많고 적음을 다투며 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이 말씀 역시 언뜻 보면 손해를 감수하라는 도덕적 훈계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흐르는 것은 '희생'입니다. 구약이 하나님의 희생을 예표로 보여주었다면, 신약은 그 희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나타난 것을 증거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내게 진짜 '내 것'이라 부를 것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소유 주장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 손에 있는 것조차 내 뜻대로 쓸 수 없습니다. 오직 진짜 주인의 뜻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이 사실, 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입으로는 "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철저히 '내 소유'로 붙잡고 살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불의요,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고린도전서 6장 7~8절이 완전히 새롭게 읽힙니다. 바울이 "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으라"고 한 것은, 그것이 훌륭한 도덕적 성취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고발하며 자기 것을 지키려는 그 모습 자체가,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라는 증거다."

형제를 고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는 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는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
불의를 당하고 속아주는 것이 믿음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여전히 '내가 무언가를 해냄으로써 인정받으려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ㅣ바울의 진짜 관심은 도덕적 처방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각성입니다. "너희는 성도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아느냐"는 물음입니다.

창고지기 이야기에서 그가 진짜로 변화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이웃을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
이 창고 안의 모든 것이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 깨달음 앞에서는 이웃을 고발할 근거 자체가 사라집니다. 잃을 '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성도가 천사보다 존귀히 여김을 받는 이유도, 예수님이 천사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피 값으로 존재합니다. 몸도, 소유도, 시간도, 관계도, 모두 예수님의 희생으로 거저 받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희생을 '구원의 통로'로만 취급합니다. 죄 용서받고 천국 가는 티켓 정도로만 여기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래서 여전히 소유를 다투고, 형제를 고발하고, 정당함을 주장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은 결국 하나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결코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평생 무언가를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자각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희생조차 나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존재라는 발각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은혜가 시작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이 깨어질 때, 비로소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합니다. 성도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매 순간 예수님의 희생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만이 남습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린도전서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