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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방향이 다른 사람들, 심판이 아니라 은혜로 서 있는 교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2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린도전서 5:12~13)

어느 어촌 마을에 오래된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밤 등대에 불을 밝히며 바다로 나간 배들이 무사히 항구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폭풍이 몰아쳤고, 배 한 척이 항로를 벗어나 표류하다가 겨우 항구로 들어왔습니다. 선원들의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갑판은 부서져 있었으며, 짐칸에 실려 있던 화물도 절반은 바다에 쓸려 나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
저 배가 과연 우리 항구의 배가 맞습니까? 저렇게 만신창이가 된 배를 우리 배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등대지기가 대답했습니다. "저 배가 우리 배인지 아닌지는 상처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배가 어디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는지를 보십시오. 저 배는 폭풍 속에서도 결국 이 항구를 향해 왔습니다. 그것이 우리 배라는 증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그 사람에게 상처가 있느냐 없느냐,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어느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리고 있는가, 즉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음행한 자의 문제를 다루면서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는 죄 지은 사람을 걸러내는 곳이구나. 악을 행하지 않는 깨끗한 사람들이 모여야 교회답구나.' 그러나 이런 이해는 얼마 못 가 벽에 부딪힙니다.

바울이 11절에서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한 대상은 음행하는 자만이 아닙니다. 탐욕을 부리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모욕하는 자, 술 취한 자, 속여 빼앗는 자까지 포함됩니다. 이 기준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교회에 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탐욕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로마서 6장 19절에서 바울은 "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을 행위의 완성으로 읽으면 우리는 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죄 앞에서 근본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조차 육신의 연약함 앞에서 계속 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
의에게 종으로 내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죄를 완전히 이겨내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탐욕이 죄인 이유는 특정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중심이라는 방향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완벽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방향을 향해 뱃머리를 돌린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은 그 방향의 근거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 안에서는 죄와 불법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언약이며 그 언약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용서가 다스립니다.

그 배 이야기에서 마을 사람들은 상처 입은 배를 보며 "
이게 정말 우리 배냐"고 물었지만, 정작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 자신도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서진 채로 돌아왔는데, 이래도 이 항구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책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항구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가 없어서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정과 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몸을 이끌고, 그럼에도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고백은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여전히 옳은 방향에 서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판단하고 내쫓으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한 말과 마주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에서 바울은 "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악한 사람을 판단하고 내쫓으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이 두 판단이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할 때의 그 판단은 행위에 대한 판단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미 생명으로 확정되어 있기에 행위로 정죄될 수 없습니다. 반면 판단하고 내쫓으라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그 방향 자체를 훼방하는 자를 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로 내쫓기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되 애통해하지 않고, 자신도 그 죄인과 동일한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발판 삼아 자기 의를 세우고 자기를 높이려는 자, 그가 바로 교회의 방향성을 무너뜨리는 자입니다.

만약 어떤 교회가 교인 수나 재정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교회의 방향이 세상의 방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해 있는 교회는 다른 것에 민감합니다. 누군가 은혜를 발판 삼아 자기 자랑과 자기 의를 세우려 할 때, 자신의 악함은 보지 않고 자기 가치만 추구하려 할 때, 바로 그때 교회는 반응합니다. 음행한 자의 소식을 듣고도 애통하지 않았던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이 그 사람을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일로 여기며 자신의 악함을 함께 보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결국 판단하고 내쫓으라는 바울의 말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죄지은 사람을 심판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앞에서 판단받고 내쫓김을 당해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이 마음 깊이 박힌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죄 앞에서 무관심할 수도, "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을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 모든 죄를 덮으신 예수님의 피, 그 십자가만을 증거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 등대지기의 말처럼, 우리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상처의 유무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만신창이일지라도, 우리의 뱃머리가 여전히 그 십자가를 향해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은혜의 항구에 속한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