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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우리는 서로의 죄 앞에 무엇을 느끼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6.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5:1~5)

어느 날 오후, 한 목사님이 교회 장로 한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소리는 낮았고,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교회의 청년부 리더로 섬기던 한 형제가 아버지의 재혼 상대인 새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
교인들은 알고 있습니까?" 장로님이 대답했습니다. "네, 꽤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장로님이 머뭇거리다 말했습니다. "그게... 다들 조용히 넘어가자는 분위기입니다. 그 형제가 봉사도 열심히 하고, 워낙 관계도 좋아서..." 목사님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무겁게 짓눌렀을까요, 그 형제의 죄였을까요? 아니면 죄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교회의 모습이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의 심정이 꼭 그러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분노는 음행을 저지른 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죄를 알고도 아무도 마음 아파하지 않고, 아무도 나서지 않은 공동체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였느냐"(2절). 바울이 쓴 단어는 '통한'입니다. 속이 끊어지듯 아파하는 것,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 그런 반응이 교회에 없었다는 것이 바울을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린도는 지금으로 치면 세계적인 항구 도시였습니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욕망도 함께 흘러들어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 사제들이 밤마다 도시로 내려와 남자들을 유혹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 의식이라 불렀습니다. 성적 문란함은 고린도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도시에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도덕적 감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더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교회가 교만해졌다는 것, 즉 아무런 통한의 마음 없이 오히려 자신들이 괜찮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와 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의 죄가 드러났을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수군거림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통증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
그 사람이 그럴 줄 알았어"라는 은밀한 우월감이 먼저입니까?

우리에게는 죄를 저울질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살인은 무거운 죄, 거짓말은 가벼운 죄. 아버지의 여자를 취한 것은 극히 무거운 죄, 시기심 정도는 괜찮은 죄. 이 저울질이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5절)고 말할 때, 우리의 속에서 무언가 반발이 일어납니다. 아버지의 여자를 취한 자도 구원을 받는다고요? 그러면 살인자도요? 그러면 독재자도요?

그런데 바울은 조용히 묻습니다. 그 저울이 당신을 향하면 어떻습니까? 당신의 죄는 가볍습니까? 당신은 그 저울 위에서 어느 쪽에 놓입니까?
죄에 무게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죄가, 우리 각자를 멸망으로 이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 누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거룩한 성도로 불린 것은 우리가 덜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우리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것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십자가가 용서를 말한다면, 음행한 자를 내어 쫓는 것은 용서와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요? 오히려 품고 가는 것이 사랑 아닌가요?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합니다. 왜일까요?

용서와 묵인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인은 죄를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는 죄를 직시하면서도 그 사람의 회복을 원하는 것입니다. 내어 쫓는 것은 처벌이 목적이 아닙니다. 5절의 말씀처럼, 그의 영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내보내어짐으로써 그가 자신의 죄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십자가의 용서를 향해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쓴 약을 먹이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아이가 아파하는 것을 원하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낫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픈 주사를 맞힙니다. 묵인은 그 어머니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 그냥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바울은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3절)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같은 건물에 모이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영으로 연결된 한 몸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느 손가락 하나가 베이면 그것은 손가락만의 고통이 아닙니다. 온몸이 그 고통을 느낍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한 지체가 죄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고통이 나에게도 전해져야 하고, 그의 죄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어느 권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젊을 때는 남의 죄를 보면서 정죄했어요. 나이가 드니까 남의 죄를 보면서 내 죄가 보이더라고요." 그분은 그것이 믿음이 자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의 죄 앞에서 자기 죄를 보는 것, 그것이 한 몸으로 연결된 교회의 감각입니다.

바울은 죄에 대해 통한히 여기지 않는 것을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얼핏 이상하게 들립니다. 교만이라면 당연히 으스대는 모습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 앞에서 무감각한 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ㅊ왜일까요? 그것은 자기가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
나는 저런 죄는 짓지 않는다'는 생각,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는 생각, 그것이 교만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서면 그런 비교는 무너집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자리에 세웁니다. 죄로 죽어야 할 자리, 그러나 용서로 살아난 자리, 그 자리를 아는 사람은 형제의 죄 앞에서 정죄보다 먼저 고통을 느낍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러는가'보다 먼저 '저 사람도 십자가의 용서를 알기를'이라는 소원이 생깁니다. 그것이 통한함이고, 그 통한함이 살아있는 교회의 증거입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결국 교회 공동체 앞에 그 일을 드러내기로 했습니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가 이것을 모른 척 넘어간다면, 우리는 그 형제가 십자가 앞으로 돌아올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십자가의 용서로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교회를 오래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죄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고, 십자가의 용서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기에 죄 앞에서 무감각할 수 없습니다. 형제의 죄가 곧 나의 고통이고, 그의 회복이 곧 나의 소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새로운 시각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을 도덕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눈으로 보는 것, 죄를 정죄하기 전에, 먼저 그 죄가 십자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 십자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한 몸으로 연결된 이유이고, 함께 모이는 이유이며, 서로를 향해 통한함으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