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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스승인가, 아버지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6.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 4:14~16)

어느 마을에 두 사람의 선생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박식한 훈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식을 셋 둔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어느 해 가을, 마을에 역병이 돌아 많은 아이들이 글을 배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훈장은 병든 아이들의 방에 들어서기를 꺼렸습니다. "
내가 병에 걸리면 누가 이 마을을 가르치겠는가." 하지만 아버지는 밤새 자식의 머리맡에 앉아 손을 잡았습니다. 가르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이야기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한 귀퉁이에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이 말은 단순한 탄식이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실상을 꿰뚫는 진단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에서 손꼽히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동서의 문물이 교차하고, 철학자와 웅변가들이 광장을 누비며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 도시의 공기 속에는 언제나 "누가 더 뛰어난가"를 겨루는 열기가 흘렀습니다. 그 열기는 교회 안으로도 스며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을 따르고, 어떤 이는 아볼로를 따르며, 각자의 스승을 내세워 파를 이루었습니다. 스승을 선택하는 것은 곧 자신의 신앙적 수준을 증명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나는 바울파다"라는 말은 "나는 그 정도 수준의 신앙인이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이 실력과 수준의 문제가 되면, 교회는 필연적으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로 나뉩니다. 가르치는 자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더 높아지려 하고, 배우는 자는 언젠가 가르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합니다. 결국 모두가 스승을 꿈꾸는 곳이 됩니다. 바울의 탄식이 여기 있었습니다. 스승은 넘쳐나는데, 아버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
세상의 더러운 것, 만물의 찌꺼기"라고 말한 직후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여기서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번번이 사업에 실패하고, 빚만 쌓아가며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 앞에 앉아 조용히 말했습니다. "
나는 네가 부끄럽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네가 진짜 부자가 무엇인지 알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아들의 실패를 들추어 망신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보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로 표현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도덕적 우위의 과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백이었습니다. 사도라는 직책, 탁월한 지성, 놀라운 복음의 전파 능력,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정직한 인식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고백으로 말하려는 것은 "
너희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수치를 주려는 말이 아닌 이유는, 이 고백 자체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자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역설적 논리입니다.

조선 시대의 서원에서는 대학자의 이름이 곧 그 서원의 권위였습니다. 율곡의 문하에 있다는 것, 퇴계의 학통을 잇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적 신분증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가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는 이것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나는 바울에게 배웠다"는 것이 신앙의 실력을 증명하는 훈장이 되었습니다. 방언이 신앙의 수준을 겨루는 도구가 되었고, 세상에서의 부요와 형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는 증거로 포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찍이 선언했습니다.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복음은 사도 바울의 실력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은 반드시 경쟁이 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더 많이 헌신하는 사람, 더 큰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이 더 좋은 신앙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위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욥의 친구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재앙을 당한 욥 앞에서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평안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증거였고, 욥이 고통받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욥의 친구가 아닌 욥의 스승이 되어 있었습니다. "
회개하라", 이것이 그들이 줄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기 마지막에서 책망한 것은 욥이 아니라, 바로 그 스승들이었습니다.

"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의 이 말은 선언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입니다. 스승은 제자가 실력 없으면 관계를 끊습니다. 발전이 없으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이 실패해도, 못나도, 돌아오지 않아도 기다립니다. 자식의 못남이 아버지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가르쳐서 완성시켜야 할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냥 자식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을 때 묻지 않았습니다. "
얼마나 반성했느냐? 얼마나 달라졌느냐?" 그냥 달려가 안았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입니다. 바울이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책망하고, 권면하면서도 등을 돌리지 않은 것은 그가 그들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 말을 처음 들으면 오히려 당혹스럽습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라고 했던 사람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충분히 스승이 될 수 있었다. 사도로서의 권위, 탁월한 학식, 복음 전파의 이력, 무엇이든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스승이 아닌 아버지로 너희에게 왔다. 이것을 본받으라."

이 말은 겸손을 미덕으로 갖추라는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부름입니다. 스승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 위에 서려 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임을 아는 사람은, 그 복음을 자기 실력의 훈장으로 달고 다닐 수 없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스승입니까, 아버지입니까? 스승의 자리는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아는 자라는 뜻이고, 아는 자는 모르는 자보다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 높음이 주는 안정감과 권위는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믿은 사람,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 더 많이 헌신한 사람, 이 모든 것이 스승의 자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 안에 스승은 없다고 말합니다. 스승이 되고자 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음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낮은 자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발견은 열심이나 헌신으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앞에서 자신의 민낯을 보게 될 때 찾아옵니다. 그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은혜 앞에 선 형제로 보게 됩니다.

교회는 한 아버지 아래 모인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 위아래는 없습니다. 더 잘 아는 자와 덜 아는 자, 더 성숙한 자와 덜 성숙한 자의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차이가 결코 스승과 제자의 위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백억짜리 그림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 1억짜리 자동차를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보화를 받은 사람이 그 외의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복음의 가치를 모른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 앞에 섭니다. 그 자리에서 스승이 되려 하십니까, 아버지가 되려 하십니까? 이 물음은 신앙의 가장 내밀한 곳을 건드립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