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린도전서 4:3~5)
1960년대 미국의 한 교도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도관들 사이에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으로 불리던 죄수가 있었습니다.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교도소 안에서도 폭력을 일삼으며 어떤 교화 프로그램에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담당 교도관조차 "저 사람은 끝났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도소 자원봉사로 찾아온 한 노인이 그 죄수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이틀, 사흘, 일주일, 그 노인은 매주 찾아와 그 곁에 앉았습니다. 몇 달이 흘렀을 때, 그 죄수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이 그것을 보여 주었고, 나는 그것 앞에 무너졌습니다." 교도관들의 눈에는 "끝난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판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한마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에 관해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용서를 얻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 어디에도 용서의 이유가 될 만한 선과 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수준의 선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낼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를 자격 있는 자처럼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 믿는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 한 마디가 인간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선하게 살려고 애를 써도,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실족하게 하는 일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온전히 가능할까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은혜지만, 구원받은 증거는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묘하게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구원이 은혜라면, 그 은혜 안에서 사는 삶 또한 은혜로 유지됩니다. 우리의 행함이 그 은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우리의 행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을 따르고, 어떤 이는 아볼로를, 어떤 이는 게바를 따랐습니다. 자기가 따르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 상대방을 깎아내렸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과거가 있었고,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난의 무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판단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강심장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실력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르시고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 그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나를 보지 말고 나를 통해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보라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이렇게도 말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받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의롭다고 입증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도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으로 자신을 옳다고 여겼습니다. 바울과 욥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책할 것이 없는 자신도 의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양심의 무죄가 하나님 앞의 무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느낄 때, 그것을 자신의 신앙과 의로움의 증거로 삼으려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그런 우리를 비난하면 즉시 분노로 반응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안 깊은 곳에 감추어진 자기 의입니다. 그리스도가 일하신다고 고백하면서도, 본성은 여전히 "내가 일한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야곱과 하나님이 밤새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한 번에 굴복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밤새도록 함께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 올 무렵,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셔서 그를 절뚝거리게 하셨습니다. 그제야 야곱은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하심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싸우시며, 우리를 끌어가십니다. 우리의 힘이 꺾일 때까지, 우리가 내 힘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알게 될 때까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네 본성이다. 네 힘으로는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항복하게 하신 다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간섭하시며 일하십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도, 베드로가 세 번 부인 후 회복된 것도, 모두 그리스도가 그들과 싸우시며 끌어가신 결과입니다. 바울의 실력이 아니라 바울을 다스리신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리스도가 아직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지금 보이는 것에만 근거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을 보고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우리의 판단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단정하고 결론 내릴 때, 우리는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은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지금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포기된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과 어떻게 싸우고 계실지, 어떻게 끌어가실지를,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누가 그가 훗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될 것이라 상상했겠습니까?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이 한 가지로 모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오늘 잘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그것이 자신의 실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싸우시며 은혜 앞에 굴복시키신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서로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는 것, 이 사람 안에서도 그리스도가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 잘한다 못한다 판단하는 대신, 그리스도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끝난 사람"으로 불리던 그 죄수에게 찾아간 노인은 아마도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일하신다.' 그 믿음 하나로 그는 매주 그 곁에 앉았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판단 없이, 기다리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판단 대신 우리가 선택해야 할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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