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린도전서 4:1~2)
어느 작은 마을에 두 명의 배달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배달을 마칠 때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먼 길을 걸었는지, 얼마나 무거운 짐을 날랐는지를 이야기하며 칭찬을 기다렸습니다. 반면 다른 배달부는 아무 말 없이 편지를 전했습니다. 누군가 "수고하셨어요"라고 하면, 그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편지를 쓴 분이 아닙니다. 다만 전달했을 뿐입니다." 첫 번째 배달부는 과연 누구를 위해 일한 것일까요? 편지를 보낸 이를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바로 이 물음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겉으로 보면 단순한 자기소개 같지만, 이 한 문장 안에는 고린도 교회를 흔들고 있던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칼날이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바울 편", "나는 아볼로 편", "나는 게바 편"이라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어느 유명한 설교자를 따르느냐를 두고 서로를 평가하고 줄을 세웠던 것입니다. 교회가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네트워크로 전락한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고린도 교회만의 이야기일까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 속에 던져집니다. 가족이라는 첫 번째 관계, 이어서 친구, 동료, 사회라는 더 넓은 관계망이 우리를 에워쌉니다. 그리고 그 관계망 안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한 가지를 욕망합니다. '힘 있는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회사 신입사원이 팀장보다 임원과 함께 점심을 먹기를 원하고, 모임에서는 영향력 있는 사람 옆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힘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곧 자신의 힘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욕망의 뿌리를 창세기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먹은 그 순간부터, 인간은 자기를 확대하려는 본성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본성은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작동합니다. 아니, 어쩌면 교회 안에서 더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신앙이라는 언어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규정했을까요? 일꾼이라는 말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일꾼은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배달부가 편지 내용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일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묶어 쓰는 두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맡은 일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생각해낼 수 없는 것, 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주받아야 마땅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명을 여시고, 아무 공로 없는 자를 거룩하다 부르시는 복음,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비밀입니다.
따라서 이 비밀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능력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전하는 자신이 그 비밀의 수혜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죽을 병에서 살아난 사람이 의사의 처방전을 들고 다니며 "이 약이 나를 살렸소"라고 전하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꾼은 자신의 탁월함이 아니라 주인의 처방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열심과 헌신을 떠올립니다.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교회 봉사를 마다하지 않고, 헌금을 성실히 드리는 것, 물론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충성은 그 이전의 것입니다. 충성은 중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충성입니다.
오래된 나침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도 바늘은 북쪽을 가리킵니다.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국 돌아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의 충성이 그러합니다. 세상의 인정에 흔들리고, 사람의 칭찬에 마음이 기울기도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다시 그리스도를 향해 돌려놓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따르고 아볼로를 따른 것은 겉으로는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신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충성한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끝내 자기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이 말은 단순한 겸손의 언어가 아닙니다. 자기만족을 삶의 목표로 삼아온 인간의 방향 자체를 뒤집는 선언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자신이 이룬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누군가가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잘 전했구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구나'로 귀결됩니다. 그렇게 자신이 비워질 때, 비로소 복음의 풍성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는 거룩한 자로 설 수 없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 사실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사람에게서 인정받으려는 욕망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영향력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더 크고 유명한 교회에 속하려 하고, 봉사와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합니다.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입니다.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입니까?
세상의 어떤 관계도, 어떤 인정도, 어떤 성취도 생명이 되지는 못합니다. 가장 힘 있는 자의 곁에 있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조차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해 중심을 잡아가는 것입니다. 잘나서가 아니라 부르심을 받았기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비밀을 맡았기에, 오늘도 그 복음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드리는 충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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