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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 하나님의 것으로 존재하는 성도의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5.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린도전서 3:19~23)

한 청년이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고 따르던 목사님이 어느 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신앙은 말씀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흔들리자 신앙도 함께 흔들렸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바로 이 문제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읽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던 세계를 내려놓고, 말씀이 보여주는 세계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말씀의 세계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말씀 앞에 바로 선 성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고통을 당하면 안 되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자기 뜻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사람을 더 열심히 실천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내려놓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이 자랑거리가 되는 순간, 교회는 세상의 모임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21절). 이것은 인격이 탁월하고 행실이 모범적인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망의 존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됨됨이와 무관하게, 인간은 이미 사망으로 선언된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를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실상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
나는 바울파", 또 어떤 이는 "나는 아볼로파"라고 나뉘어 다투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 전체를 통해 그 어떤 사람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7절). 이 한 문장이 바울의 전부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한마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
복 받는 비결', '기도 응답 받는 비결'을 끊임없이 찾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는 그 모든 것이 어리석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 증거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동원해 하나님께 충성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충성의 내용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빛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땅에 엎드러진 바울에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그 순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불태웠다고 믿었던 자신의 모든 열정이,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둠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고 확신했던 그 확신 자체가, 자기 꾀에 빠진 어리석음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었을 뿐, 아무도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행 9:7). 빛은 비치고 있었지만 어둠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빛을 본 것은 바울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열정이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22절에서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만물이 성도의 것이라는 말은 만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23절이 그 답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만물이 성도의 것이라 해도,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 세계, 생명, 사망, 현재, 미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 뜻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언 3장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선을 베풀 형편이 되는가? 나는 이웃에게 얼마나 베풀고 있는가?' 그리고 그 베풂을 자신의 믿음의 증거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잠언이 말하는 핵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선을 베풀 힘이 있다면, 그 힘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닌 힘으로 선을 베푸는 것이니, "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마땅히 받을 자가 왔을 때 바로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셨음을 진심으로 아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 기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주 실패하는지를 압니다. 선을 베풀 능력이 있어도 계산하고, 재보고, 조건을 붙입니다. 그렇기에 설령 선을 베풀게 되더라도, 말씀 앞에 선 성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잊지 않습니다. 자랑이 아니라 은혜를 고백합니다. 성도가 선을 베푸는 것은 도덕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통로가 되는 순간들입니다.

결국 바울이 이 모든 말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그리고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모든 것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자신의 사역도, 아볼로의 가르침도, 세상의 흥망도, 생명과 사망도,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무엇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했으니 복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인간의 행함과 무관하게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에 대한 자격 심사가 아닙니다.
'사람을 자랑하면 성도가 아니다'는 판정을 내리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이 어떤 세계를 살아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체가 아님을 아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사하고, 그 은혜를 전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