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린도전서 4:17~21)
어느 날 한 신문에 연쇄 절도범의 얼굴이 크게 실렸습니다. 사람들은 기사를 보며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머, 저렇게 선하게 생긴 사람이 어떻게?"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눈빛이 온화한 그 얼굴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온 '범죄자 이미지'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인상이 험상궂은 사람이 장애인을 도왔다는 기사가 나오면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랍니다. "저렇게 무섭게 생겼는데 저런 사람이었어?"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액자 하나씩을 걸어 두고 삽니다. 그 액자 속에는 우리가 오랜 시간 상상하고 기대해온 모습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떻게 생겼고, 악한 사람은 어떻게 생겼으며, 메시아라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이고, 교회는 어떠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이어야 한다는 그 모든 이미지들이 우리 내면 깊이 박혀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 액자를 단 한 번도 채워드리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외모가 볼품없다는 예언이 아닙니다. 메시아에 대해 사람들이 품어온 모든 기대, 즉 찬란한 위엄, 압도적인 권위, 세상을 정복하는 힘, 그 어떤 것도 이 메시아에게는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액자 속의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릴 칼을 든 왕을, 기적으로 군중을 압도하는 지도자를 말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 액자는 산산이 부서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액자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그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인자하고 온화하며, 보는 이마다 "예수님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 얼굴들입니다. 그 그림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들이 이사야의 예언과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 액자 속 메시아를 그리고 싶어 합니다.
1940년대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던 코리 텐 붐은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어머니와 언니를 잃었습니다. 악취 나는 막사, 이 들끓는 침상, 날마다 이어지는 굴욕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녀는 마지막 한 권의 성경을 품에 안고 살았습니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그녀는 한 집회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간수를 만났습니다. 그 간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어 손을 내밀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코리의 증언에 따르면,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용서가 없었습니다. 분노와 증오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이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저를 통해 흘려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손을 내밀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그녀의 몸을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능력'의 세계입니다. 어떤 웅변가도, 어떤 심리 치료사도, 어떤 도덕 교사도 코리 텐 붐에게 그 손을 잡으라고 설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로는 불가능합니다. 이성으로도, 의지력으로도 닿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받았다고 말합니다(고전 4:13).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 없이 떠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말로 되는 일입니까? 결심으로 되는 일입니까?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액자를 갖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기쁨이 넘치며,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교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를 보면 실망합니다. 분쟁이 있고, 음행이 있고, 소송이 있고, 은사를 놓고 다투는 교회입니다. "어쩜 저렇게 교회답지 못한가?"
그런 시각으로 바울의 말을 읽으면 이렇게 들립니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 실천하는 믿음을 가져라."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집회가 끝나면 사람들은 결심합니다. "그래, 우리 그렇게 하자."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입니다. 말로 했고, 결심으로 했고, 그러나 삶은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 차원이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전 4:17). 디모데가 가르칠 내용이 아니라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잊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토록 연약하게 오셨습니까? 삼손 같은 힘을 감추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힘없는 분이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잡으러 왔을 때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한마디만 하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침묵하셨습니다. 군중이 조롱할 때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약하셨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고후 13:4). 예수님의 사역에서 예수님 자신의 힘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분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부활까지, 그 모든 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30년을 섬겼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음식도 낯선 땅에서 병을 얻었고, 가족과 생이별했으며, 본국 교회의 지원이 끊긴 해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모든 시간을 견디셨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견딘 것이 아닙니다. 견딜 힘이 내게는 없었습니다. 다만 붙들려 있었습니다." 붙들려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잘남과 강함이 필요 없는 나라, 오히려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나라,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받아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내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나를 죽음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 이것은 협박이 아닙니다. 하나의 질문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원하는가? 말입니까, 능력입니까? 말을 원한다면, 설득력 있는 설교, 감동적인 간증, 그럴듯한 결심, 그것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일주일 후, 한 달 후, 다시 제자리입니다.
능력을 원한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것이 어떤 삶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높음과 강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낮음과 약함의 길로 가게 하는 것, 그 길이 어리석어 보여도 그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게 하는 것, 만물의 찌꺼기처럼 여김받아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하는 것, 그것이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늘 우리는 예수도 말하고, 십자가도 말하고, 은혜도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말합니다. 그러나 무슨 힘으로 사는지를 모른다면, 그 모든 것은 말일 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배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나의 우월함과 자랑이 되는 믿음을 가르침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약함 속에서 붙들리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그 가르침이 지금 이 순간 다시 생각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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