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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돌을 들 수 없는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5.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린도전서 4:18~21)

어느 날 오후, 한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도덕 시간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칠판에 "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제목을 쓴 뒤,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나요?" 손들이 하나둘 올라갔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친구의 이름을 댔고, 어떤 아이는 자신 있게 "저는 거짓말을 안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교사는 잠시 침묵한 뒤, 조용히 되물었습니다. "오늘 아침, 지각한 이유를 부모님께 뭐라고 했나요?" 교실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문제를 발견하는 일에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저 사람은 이기적이다, 저 사람은 신앙이 없다, 저 교회는 문제가 많다." 그런데 그 판단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관대해집니다. 타인은 현미경으로 보고, 자신은 흐릿한 안경 너머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 음란, 교만, 혼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
저런 교회가 있었군. 우리는 저러면 안 되지.'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이미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과 똑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자신을 의인의 편에 놓고, 문제 있는 저쪽을 향해 돌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 있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 죽여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그 자리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죄인과 의인, 돌을 맞아야 할 자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자,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한마디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손에 쥔 돌을 내려놓으며, 하나둘 자리를 떠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간음을 괜찮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드러내신 것은 돌을 든 자들의 민낯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죄를 고발하면서, 정작 자신들도 동일한 정죄의 대상임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들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돌을 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돌에 맞아야 할 자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
바울은 편지로는 강하지만 직접 만나면 몸도 약하고 말도 시원치 않다." 바울이 돌아오지 않으면 교회를 자기들 뜻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리면서도, 교회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겠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이 짧은 말 속에 바울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정조차 하나님의 허락 아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이 그를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할 때도,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파선을 당할 때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에서 오는 겸손입니다.

겸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격 수양에서 오는 겸손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훈련, 이것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겸손은 결국 자기 힘으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힙니다. 더 많이 낮춘 자신을 은근히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에서 오는 겸손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낮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결정할 여지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먼저 나를 규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됩니다.

어느 목사가 오래된 교인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
신앙생활 수십 년 하셨는데, 요즘은 어떠세요?" 그 교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은혜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사람 안에서 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를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교만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묻습니다. "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이 말은 단순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바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후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매를 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돌을 들지 않고 여인에게 나아가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가능하려면, 먼저 자신도 돌에 맞아 마땅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정죄의 대상임을 직시할 때 비로소, 타인을 향해 매가 아닌 사랑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오랜 고통 끝에 하나님 앞에 서서 고백했습니다. "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말이 무지한 말이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신앙에 대해, 교회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삶의 한 순간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이야기는 2천 년 전 지중해 연안 어느 도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싶어 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면서도 복음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기를 바라는 우리,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그 확신 자체가 이미 교만인 우리,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타인을 향해 들었던 돌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움켜쥐었던 돌도, 그리고 예수님이 돌을 들지 않고 여인에게 나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그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은 돌을 들게 하지만, 능력은 돌을 내려놓게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
주께서 허락하시면." 오늘도 이 말 하나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복음 안에 서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