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린도전서 5:6~8)
어느 마을에 오래된 빵집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매일 새벽 반죽을 준비했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써 오던 종균 통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통 속의 누룩은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상해 있었지만, 냄새가 심하지 않아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 사용했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손님들이 하나둘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빵에서 이상한 신맛이 나요." 주인은 억울했습니다. 밀가루도 좋은 것을 쓰고, 정성도 다했는데 왜 그런 말을 듣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밀가루가 아니라, 아주 작은 양의 상한 누룩이 반죽 전체에 이미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 바로 이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6절). 고린도 교회에는 이방인 사이에서도 없는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정작 질책한 것은 음행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그 일을 알고도 "통한히 여기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문제는 죄가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죄를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며 태연했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교회를 이렇게 상상합니다. 목사의 독단이 없고, 교인들이 함께 의논하며,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교회, 문제가 없는 교회, 실제로 어떤 교회는 홈페이지에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지루한 설교가 없습니다. 등록 강요가 없습니다. 헌금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참신하다고 박수쳤습니다. 불편한 것들을 다 없앤, 가장 편안한 교회,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지루한 설교를 없애고, 불편한 절차를 다 걷어내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교회를 만든다 해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겉으로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해 보이는 사과의 속을 갈라보면 이미 물러 있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겉모습을 다듬는 것과 속이 실제로 건강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불편한 제도 몇 가지를 없앤다고 교회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는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누룩 없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말합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희생으로 누룩 없는 자, 곧 인간의 의로움과 상관없이 거룩하게 된 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는 여전히 버리지 못한 오래된 누룩, 곧 자기 의로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은 평생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예배에 빠진 적이 없고, 봉사도 앞장서서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누군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분의 첫 반응은 이랬습니다. "나는 저런 일과는 상관없어요. 저는 그렇게 산 적이 없으니까요." 이 말 자체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마음, 곧 자신을 남과 구별 짓고 자신의 깨끗함을 은근히 자랑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바울이 말하는 묵은 누룩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죄는 없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선함으로 서 있다고 믿는 순간,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오래된 누룩이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인용하며 경고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부도덕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도덕적 훈련과 종교적 열심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을 세우려는 마음, 그것이 바로 누룩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누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바울의 답은 명확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옛적 애굽에서 죽음의 천사가 지나갈 때, 살아남은 집은 도덕적으로 흠 없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이었습니다. 그 집 안에 있던 사람이 선했는지 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피, 그것 하나가 생사를 갈랐습니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밤, 강물이 위험 수위까지 차올랐을 때 안전한 것은 수영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튼튼한 방주 안에 있느냐 없느냐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거룩한 자로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방주, 그 피 뿌려진 문설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원했던 교회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음행한 자를 쫓아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는, 완전무결한 교회였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그 죄를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이 곧 나의 죄이기도 하다"는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는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가족 안에서 자녀 하나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다른 형제가 "나는 저 애와 달라요, 나는 저런 짓 안 했어요"라며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부끄럽고 아프다"고 함께 짊어지는 마음과 같습니다. 같은 핏줄이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은혜 아래 서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빵집 주인이 결국 상한 누룩 통을 완전히 비우고, 새로운 재료로 다시 시작했다고 해보십시오. 그날부터 그는 매일 아침 통을 열어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혹시 오늘도 오래된 것이 남아있지는 않은가."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피로 새 덩어리가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일 우리 속에 자리 잡으려는 묵은 누룩, 곧 자기 의로움과 스스로를 자랑하려는 마음을 경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 앞에서도 여전히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붙들고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이 없어서 좋은 교회라는 자랑이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피 아래 서 있다는 고백, 그것이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을 먹는 삶입니다.
'신약 말씀 묵상 > 고린도전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린도전서 - 우리는 서로의 죄 앞에 무엇을 느끼는가 (0) | 2026.06.26 |
|---|---|
| 고린도전서 - 돌을 들 수 없는 사람들 (0) | 2026.06.15 |
| 고린도전서 -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 (0) | 2026.06.02 |
| 고린도전서 - 스승인가, 아버지인가 (0) | 2026.05.26 |
| 고린도전서 - 만물의 찌꺼기 같이 (0) | 2026.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