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고린도전서 6:1~8)
김 집사는 삼십 년 지기였습니다. 같은 교회를 이십 년 넘게 다녔고, 자녀들 결혼식 주례도 서로 부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동업으로 시작한 작은 사업이 문제였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자 서로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고, 결국 김 집사는 오랜 친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 일로 편이 갈렸습니다. "김 집사가 옳다", "아니다, 저쪽이 억울하다" 하며 성도들끼리도 편을 나눠 다투었습니다. 법정에서 판결이 나던 날, 김 집사는 승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교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 다녔습니다. 김 집사는 이겼지만, 무언가를 잃었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잃었는지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6장은 바로 이런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가 서로 다투다가 세상 법정으로 문제를 가져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단순한 분쟁 사건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사건 속에서 교회가 무엇을 잊어버렸는지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재판 절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교회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를 다시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이 구원받기 위해 모인 편의 시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불러 모으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목적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사는 세상과 교회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도덕이나 윤리의 수준이 아닙니다. 성경이 세상을 불의하다고 규정하는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 나쁘게 산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잣대로 보았을 때 세상 전체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세상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마치 자신도 세상과 똑같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세상의 방법과 방향으로 그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어긋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성도는 세상을 심판할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죄인 된 나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생명의 문제 앞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보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가 형제와 다투다가 세상 법정에 가서 판단을 구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판단해야 할 자리에 있는 교회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고발까지 하는 사람의 속마음은 대개 이것입니다. "나는 정당하다. 잘못이 없는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은 억울하다." 김 집사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기에 법의 판단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것을 지킨 것으로 충분히 목적을 이룬 셈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애초에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영광과 가치를 지키며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러니 고발 자체가 이미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를 기준으로 삼은 행동이라는 점에서 어긋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청합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눅 12:13). 아버지의 유산을 형이 독차지하자 억울함을 느낀 동생이 예수님께 중재를 부탁한 것입니다. 세상 법정이라면 답은 간단합니다. 상속법의 기준에 따라 형에게서 정해진 몫을 받아내면 됩니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그렇게 판단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4~15). 예수님은 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자기 문제의 해결사로만 여기고 찾아온 그 마음 자체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동생은 유산의 억울함만 생각했을 뿐, 자신의 인생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산을 나누어 주셨다면 동생은 억울함은 풀었겠지만, 예수님을 오해한 채로 살다가 결국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으로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바울은 7~8절에서 더 나아갑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얼핏 들으면 무조건 참고 당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바울의 핵심은 그것이 미덕이라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형제와의 갈등을 피하려고 손해를 감수했다면, 세상은 그 인격을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불의를 당하고 속아주는 이유는 인격 수양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속고 불의를 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성도가 자기 억울함만은 절대 참을 수 없다며 세상 법정으로 달려간다면, 그것은 이미 삶의 출발점이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셈입니다.
김 집사가 소송에서 이긴 지 몇 년이 지난 뒤,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친구와 함께 나눴던 신앙의 대화, 함께 기도했던 시간, 그 모든 관계를 다 잃었더라고요. 법정은 내 돈은 지켜줬지만, 내 형제는 지켜주지 못했어요." 그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것은 정당함이었지만, 놓쳐버린 것은 십자가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 가져가 옳고 그름만 가려낸다면, 교회는 그저 세상과 같은 기준으로 움직이는 또 하나의 집단이 되고 맙니다. 반면 그 문제를 통해 십자가의 은혜와 존귀함을 다시 배우는 자리로 삼는다면, 억울함을 당했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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