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린도전서 6:9~11)
한 소방관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화재 현장에서 아이를 구하다가 얼굴과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자신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는 늘 긴팔 옷을 입었고, 여름에도 목까지 올라오는 스카프를 둘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고개를 약간 숙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화상 자국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긴팔을 입고 스카프를 두르고 조명을 피해 앉아도, 아내에게 그는 이미 다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가릴수록 오히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만 더 도드라졌습니다. 아내가 그에게 해 준 것은 화상을 지워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걸 가리지 않아도 당신을 압니다. 그리고 그래도 당신과 함께 삽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나눌 성경의 장면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든 것입니다.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그들에게 부끄러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몸이 드러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창조 때부터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진짜 부끄러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손을 댄 것은 몸의 일부를 가리는 치마였습니다. 근본 문제는 그대로 둔 채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가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배에 큰 구멍이 났는데 갑판 위에 예쁜 카펫을 까는 것과 같습니다. 물은 여전히 밑에서 차오르고 있는데,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은 카펫뿐입니다. 카펫이 아무리 두껍고 정교해도 배는 가라앉습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건너와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존재의 차이가 있다고 믿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절제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신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의 목록을 나열합니다.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전통적인 이해라면 이렇게 정리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버리고 거룩한 신자로 변화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여기서 소방관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그가 긴팔 옷과 스카프로 화상을 가린다고 해서 화상이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그의 몸에는 화상이 있습니다. 다만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한 모습을 갖춘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 존재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또 하나의 치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저는 남색이나 우상 숭배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맞습니다. 목록의 항목 하나하나를 따진다면 나와 무관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탐욕과 무관하다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음으로 품는 정욕도 간음이고, 형제를 향한 멸시의 말도 살인에 해당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의 목록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본질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도덕과 인격이라는 옷을 아무리 잘 갖춰 입어도 그것은 화상을 가리는 긴팔 옷과 같을 뿐, 화상 자체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는 놀라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이 손수 만들어 입은 치마를 벗기셨다는 것입니다.
왜 벗기셨을까요? 인간이 무엇을 만들어 자기를 가린다 해도 이미 부끄러운 존재가 된 인간의 본질은 결코 가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죽옷을 지으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생명의 값이 치러져야 했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시는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소방관의 이야기에서 아내가 그에게 준 것은 새로운 스카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화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그와 함께하겠다는 존재 자체의 개입이었습니다. 소방관이 더 이상 스카프에 집착하지 않게 된 것은 스카프 없이도 자신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바울은 목록을 나열한 뒤 곧바로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이 어떻게 거룩함과 의로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스스로 애써서 불의를 벗어버리고 노력한 결과였을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되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진 가죽옷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은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3장은 이 옷이 곧 그리스도임을 알려줍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새 옷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히신 그리스도라는 옷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도들이 실제로 부딪히는 현실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는데, 삶을 돌아보면 여전히 불의한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화를 내고, 시기하고, 탐욕을 품습니다. 이런 자신을 볼 때마다 성도는 좌절합니다. “나는 아직도 변하지 않았구나.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성도답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의 생각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행동으로 옷을 지어 입음으로써 부끄러움을 가리고, 세상이 인정해주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벗기신 치마를 다시 주워 입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소방관이 다시 스카프를 두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내의 사랑을 다시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내 화상을 보면 아내가 실망하지 않을까. 더 가려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사랑을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불안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계속해서 자기 의로 자신을 가리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입히신 옷을 진심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6절에서 자신과 아볼로를 본으로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본이 무엇이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 헌신하고 이웃을 도운 행위의 모범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보인 본은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아볼로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믿음의 실천입니다. 자기 행함을 자랑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지 않는 것. 이는 자신이 여전히 불의한 자였음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 옷을 스스로 지어 입은 사람은 반드시 남의 옷차림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혀 주신 옷을 입은 사람은 남을 판단할 근거를 잃습니다. 자신도 그 옷이 아니었다면 벌거벗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소방관은 훗날 화상 방지 교육을 다니며 자신의 흉터를 오히려 사람들 앞에 내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흉터를 가장 편안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흉터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흉터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그 안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자기 구원을 말할 때 옳은 고백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불의한 자였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내가 힘써서 이루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입은 치마는 하나님이 이미 벗기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불의한 모습이 보입니까? 그것을 보고 낙심하기보다,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성도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죄와 무관한 완전함을 전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와 씨름하는 자리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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