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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이미 값을 다 낸 손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8.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린도전서 6:12~14)

어느 레스토랑에 특별한 손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식당의 오랜 단골이었는데, 어느 날 주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
오늘부터 당신은 무엇을 주문하든, 얼마를 먹든, 이미 계산이 끝났습니다. 평생 값을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님의 얼굴에 두 가지 표정이 스쳐 갔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이었고, 곧이어 당혹감이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아무거나 먹어도 됩니까? 심지어 상한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나도록 폭식을 해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주인은 웃으며 답했습니다. "
값은 이미 다 냈으니, 당신이 무엇을 먹든 계산서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상한 음식을 먹는다면 아파지는 것은 당신의 몸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자유를 드린 것이지, 당신을 해치라고 자유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14절의 말씀은 바로 이 역설, 이 긴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놀라운 말을 합니다. "
음행을 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처음 듣는 순간 마음이 불편해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불편함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도덕과 윤리가 믿음과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앞선 11절에 있습니다.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이와 같은 자들'이란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불의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한 아버지가 오랫동안 집을 나가 방탕한 삶을 살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가 저지른 잘못의 목록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그를 끌어안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행위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을 지킨 자와 지키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주어지는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은 "
예수를 믿으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바울은 즉시 브레이크를 겁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이 말을 이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음행은 해도 되지만, 유익하지 못하니까 하지 말자.' 마치 담배가 몸에 나쁘니까 참는 것처럼, 실용적인 이유로 죄를 피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훨씬 깊은 곳에 있습니다.

바울은 음식과 배의 비유를 듭니다. 음식은 배를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의 즐거움이 결국 사라질 것임을 보여줍니다. 마치 화려하게 지어진 모래성이 밀물이 들어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육신의 쾌락을 위한 삶은 결국 허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놀라운 반전을 제시합니다. "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몸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이 이제 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 오래된 집 한 채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원래 이 집은 세입자가 자기 마음대로 벽을 부수고, 페인트를 칠하고, 가구를 배치하며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을 완전히 다른 주인이 값을 치르고 사들였습니다. 이제 이 집은 세입자의 것이 아니라 새 주인의 것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세입자의 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음행이 사회적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유익하지 않다는 실용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몸이 이미 주를 위한 몸으로 존재한다는 시각에서, 음란은 그 몸의 참된 방향과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입자였던 옛사람의 습관대로 벽에 못을 박으려 할 때, 문득 '이 집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갑자기 부활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왜 여기서 부활 이야기가 나올까요? 이것은 우리의 몸이 단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 영원히 주와 함께 하는 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낡은 옷이 그대로 다시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옷, 부활하신 주의 몸을 닮은 새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두 가지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는 '몸은 어차피 없어질 것이니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방종의 오류입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가 헬라 이원론의 영향으로, 육체로 짓는 죄는 영혼과 무관하다고 여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 다른 오류는 반대로 '내 몸으로 무언가 선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는 자기 노력의 오류입니다.

목사가 정해주는 항목이 아니라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
내 몸으로 주를 위해 무엇을 할까?" 그리고 목사가 어떤 실천 항목을 정해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면서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려 합니다. 마치 시험 범위를 정해주면 그것만 외워서 시험을 통과하려는 학생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실천 목록이 아닙니다. 이미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완성의 세계에 존재합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야 할까요? 오히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불의했던 나를 그 완성의 세계로 옮겨 놓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완성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완성시키신 그분의 피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처음의 레스토랑 이야기에서 그 손님은 결국 깨닫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먹든 계산서와는 상관없다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 자유를 준 주인의 마음을 알게 된 후로는 예전처럼 아무렇게나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값을 치른 그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몸은 이제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몸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
나는 무엇을 해도 되는가"가 아니라, "그 피의 은혜가 지금 내 안에 있는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