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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허락과 명령 사이에서, 은혜로 사는 법을 배우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3.

고린도전서 7장 5~6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몇 해 전, 한 청년이 상담실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고, 성경 통독도 몇 번이나 마쳤고, 봉사도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늘 그늘이 있었습니다. "
목사님, 저는 매일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마음 한켠에서는 자꾸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나. 나는 이만큼 노력하고 있지 않나.'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제가 위선자처럼 느껴집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 하면서, 속으로는 의인처럼 살고 싶어 하는 저 자신이 너무 싫습니다."

이 청년의 고백은 사실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이것을 마음의 이중구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관념으로는 죄인이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의인의 자리를 향해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이 말씀에서 바리새인은 '의인'으로, 세리와 창기는 '죄인'으로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세리와 창기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죄인이란, 실제로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어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수준 높은 도덕적 삶을 산다 해도, 그 모든 행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예수님이 찾으시는 '죄인'입니다. 반대로 세리처럼 살면서도 스스로 의롭다 여긴다면 그는 여전히 바리새인입니다. 문제는 겉모습의 도덕성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무엇으로 여기느냐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진짜 문제는 율법을 지킨 것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정답으로 규정해 버린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살아야 신앙인답다'는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성취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얻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오래전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도 신앙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익숙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은 곧 지켜야 할 명령이라 여기고, 그 명령을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하는가로 신앙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관 속에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의로운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종교인들만 넘쳐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이들이 죄인으로 드러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결혼과 독신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거룩한 것 아닐까? 결혼한 사람은 신앙의 수준이 낮은 것 아닐까?' 당시 헬라 철학, 특히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질문에 명쾌한 하나의 답을 주지 않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해 각각 자기 아내와 자기 남편을 두라"(1~2절)고 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합의하여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하지 못함으로 사탄의 시험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우리는 이것을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도가 하는 말이니 곧 주님의 명령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이 한 문장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큽니다. 만약 바울이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고린도 교회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틀림없이 '분방하지 않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과 못 지키는 사람을 나누어 판단했을 것입니다. 결혼과 금욕에 관한 바울의 권면이 하나의 새로운 법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미리 차단합니다. 자신의 말이 사도의 권위를 입은 새로운 율법으로 둔갑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이후 7장 전체를 보면 이 패턴이 계속 반복됩니다. 결혼한 자들에게는 "
내가 명하노니"라고 하면서 주의 명령임을 분명히 하지만, 12절에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나의 말이라"고 구분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갈라서고자 하면 갈라서도 좋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을 읽는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딘가에서는 "
갈라서지 말라"고 하고, 어딘가에서는 "갈라서도 된다"고 합니다. 바울이 주님의 명령을 스스로 뒤집는 것일까요?

이 혼란을 풀 열쇠는 '명령'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명령을 '지켜서 실천해야 할 규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명령은 이것과 결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요 12:49~50)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순종하여 실천하면 얻게 되는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명령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명령 자체가 말씀의 권능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무덤 속의 나사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을 때, 나사로가 나온 것은 나사로의 결단이나 실천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애초에 실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를 살려낸 것은 오직 말씀의 권능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말씀의 능력이며,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요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계신 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의 자리이지, 인간의 행위가 끼어들 틈이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아들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여기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규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은혜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자신의 행함과 실천으로 의를 이루려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복을 자기 것으로 끌어당기려는 인간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 자세로 아무리 많은 것을 행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무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의 명령에 거하는 것이며 참된 순종입니다.

이제 바울이 왜 "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 충성된 자가 된" 사도로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고 고백합니다(25절).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주의 자비를 깨달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통찰이기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바울이 염려한 것은 자신의 권면이 새로운 법이 되어, 고린도 교회가 그것을 지키고 못 지킴으로 서로를 판단하는 도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금욕주의의 영향으로, 결혼했으면서도 일부러 부부관계를 멀리하며 그것을 신앙의 경건함으로 자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향해 "
분방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지켜야 할 새로운 규정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 권면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개역한글판에서 '허락'이라는 단어는 '권도'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허용과 용서에 가깝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결혼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로 서로를 나누고 차별할 근거가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상담실을 찾았던 그 청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
당신이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그 이중적인 마음,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 마음을 없애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순된 자신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저는 여전히 저를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조차 저의 연약함입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 고백의 자리, 자신의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는 그 자리가 바로 은혜가 임하는 자리입니다."

주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결국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보겠다는 오래된 욕망의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길은 그것과 다릅니다. 모든 것이 허락된 용서의 세계, 결혼도 독신도, 기도함도 기도하지 않음도,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을 가르는 잣대가 될 수 없는 은혜의 세계,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무엇을 하고 안 하고를 다투는 것을 그치고, 실패한 자리에서 오직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