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7장 12~17절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갈림길에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성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쪽이 신앙적인 선택일까?" 직장에서 주일 근무를 요청받을 때도, 집안의 제사 문제 앞에서도, 부부 사이에 큰 갈등이 있을 때도 마음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올라옵니다. 두 갈래 길 중 하나는 신앙적이고 다른 하나는 비신앙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에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전제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적 행동'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요? 교회가 가르쳐 온 신앙적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두 가지 틀 안에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 생활(예배, 헌금, 봉사)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입니다. 그런데 윤리는 신앙과 상관없이 양심과 도덕의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아파트 옆집을 떠올려 보십시오. 교회에는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는 아저씨가 매일 새벽 계단을 쓸고, 명절이면 홀로 사시는 어르신께 과일을 들고 찾아갑니다. 부모님께 극진한 효자이고, 법도 성실하게 지키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신앙의 증거'라며 내놓을 수 있을까요? "저는 십일조를 합니다", "저는 술을 안 마십니다" 하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그분과 우리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불편해집니다. 우리가 '신앙적'이라고 믿어 온 행동들이 사실은 신앙의 증거가 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결혼과 이혼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리도 비슷하게 묻습니다. "잘 사는 것과 이혼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신앙적입니까?"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신앙적이고, 이혼은 비신앙적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는 성도의 가정은 사랑과 행복이 가득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믿음이 사랑하게 하고 용서하게 하니, 믿는 사람의 가정은 좋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 10, 11절의 "갈라서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당연하게 들립니다. 12, 13절도 자연스럽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버리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5절에서 걸립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구애될 것이 없다'니, 이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어지는 16절은 더 헷갈립니다.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그렇다면 배우자가 떠나겠다고 해도 끝까지 붙잡고 설득해서 구원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렇게 하라는 것인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의 말이 애매하게 들리는 이유는, 바울이 애매해서가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 '이혼은 비신앙적이다'라는 고정관념이 굳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신앙적인 행동이다"라고 목록을 만들어 주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신앙적이라고 여겨 온 행동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찢어 버립니다. 어떤 행동도 신앙의 증거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도 복음 앞에서는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혼 여부 역시 신앙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이 성화되어 의인이 되면 구원하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죄인 그대로를 찾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혼 문제도,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 문제도 '어느 쪽이 더 신앙적인가'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부부 중 한쪽만 믿을 때 갈등이 생기는 일은 흔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불교 집안의 장남이고 아내만 교회에 다닌다고 해 봅시다. 명절마다 제사 문제로 다투고, 아내가 헌금하는 것이나 주일 봉사로 바쁜 것이 못마땅해 부부 사이에 냉기가 흐릅니다. 이럴 때 아내는 괴롭습니다. "이혼하고 내 신앙을 지켜야 하나? 아니면 가정을 지키려고 교회를 포기해야 하나?" 어느 쪽이 신앙적인 선택인지 답을 내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갈등의 경우를 하나하나 따지지 않습니다. 기준은 단 하나, 믿지 않는 배우자의 뜻입니다. 믿지 않는 쪽이 함께 살기를 원하면 버리지 말고, 떠나기를 원하면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함께 살고 싶은지 아닌지는 묻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성도의 덕을 보여 주려고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신앙은 맹목적인 순응이 되고 맙니다. 바울의 관심은 이혼을 신앙의 문제로 끌고 가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혼 여부로 신앙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서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내가 저 사람 예수 믿게 하면 되지." 그런데 그 말은 사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이 조금 부끄러워서, 스스로에게 명분을 세워 줄 때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저 사람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일지도 몰라." 물론 믿는 배우자 때문에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믿는 배우자의 능력이나 선한 행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 집마다 있던 펌프를 기억하십니까? 물이 나오지 않을 때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붓고 힘껏 펌프질하면 지하 깊은 곳에서 물이 솟아오릅니다. 그런데 그 마중물이 물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마중물은 그저 쓰임을 받았을 뿐이고, 물은 처음부터 땅 아래에 있었습니다. 믿는 아내와 남편은 이 마중물과 같습니다. 남편을 사랑하고 본을 보이며 애쓰는 아내 덕분에 남편이 믿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아내의 사랑이 남편을 구원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내를 도구로 쓰셨다는 뜻입니다. 잘해 주었는데도 남편이 믿지 않는다면 그것도 아내의 실패가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16절은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다스리시는 일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네가 어찌 아느냐?"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이 사람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결혼식 간증에서도, 부부싸움 뒤 화해의 순간에도 이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으로 만났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시는 데까지만 하시고, 이후의 결혼 생활은 "이제부터는 너희 몫이다" 하고 손을 떼신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남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그 이후의 다스림과 간섭도 계속됩니다. 그래서 믿는 배우자는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이 사람을 구원하실 수도 있다."
고린도의 상황도 생각해 보십시오. 고린도는 본래 복음을 알지 못하던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와서 복음을 전하자 어떤 부부는 아내만, 어떤 부부는 남편만 믿게 되었습니다. 결혼할 때는 둘 다 믿지 않았는데 결혼 후에 부부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갈린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고, 그래서 바울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간섭이라면, 부부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뉜 것도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는 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나와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로 쉽게 이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묻는 것은 이혼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사람 뒤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 이 질문은 나를 위한 내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냅니다.
이제 17절입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성도답게 보이려고' 성도다운 행동이 무엇인지 살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혼은 성도로서 부끄러운 일인데,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 속에 갇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혼을 했든 안 했든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부르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 안에서 의인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의인이 되었으니 의인답게 나오라"가 아닙니다. 부르신 그대로, 죄인으로 나아와서 의인 되게 하신 은혜의 깊이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지금보다 나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합니다. 더 성도다워지고 인정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혼하면 안 된다, 좋은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규칙이 생겨납니다.
이혼하지 않고 참고 사는 것,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 믿지 않는 배우자를 전도하려고 잘해 주는 것, 이런 것들이 예수를 증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애썼는데도 배우자가 믿지 않으면 우리는 실망하고 화가 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 분노는 내가 배우자의 구원을 내 뜻대로 주관하려 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잊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도는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나의 어떤 노력으로도 남을 예수 믿게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혼하지 않고 함께 잘 산다고 해서 "나는 성도답게 살고 있다,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몸은 한집에 있어도 마음은 수시로 갈라섭니다. 같은 지붕 아래 등 돌리고 누워 있는 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몸으로 갈라서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혼하지 않는 것이 성도다운가?"라는 물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살아갑니다. 이혼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의가 되었고, 그 죽음이 우리를 부활이라는 새 생명으로 다시 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혼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더 큰 결혼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신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선택된 신부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관계 안에서,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로 잘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랑 되신 분이 우리를 죄인 그대로 찾아오셔서 자기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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